4월의 기록
4월의 기록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4.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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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

언젠가 서울에서 역사학자 한 분을 만났을 때 그 분은 내가 제주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대뜸 4·3 얘기를 꺼냈다.

자신이 4·3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였는데 당시 고등학생이던 형님이 제주의 친구네 집을 방문했다가 한 마을이 집집마다 같은 날 제사를 지내더라는 목격담을 통해서였다고 했다.

처음 듣는 먼 제주의 이야기였고 철이 없던 나이였지만 형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고 생생한 어조로 알려줬다.

역사책도 아니고 역사 이야기도 아니고 하필이면 목격담이어서 그랬는지 그는 더욱 구체적이고 실감 나게 4·3이라는 역사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제주도민 모두가 4·3에 대한 책 한 권씩을 써야 한다고 당부 아닌 당부를 하는 거였다.

증언집이건 자서전이건 전기이건 형식은 관계없다. 본인의 이야기든 부모, 형제의 이야기든 친척의 이야기든 누군가든 상관없다. 부지런히,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하고 정리해 둬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사실 그런 요지의 말은 처음 들은 것도 아니었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 날따라 유난히 가슴에 박힌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얼마 전의 일이다. 어떤 노인네 한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4·3 당시 미군 밑에서 얼마간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다. 그 때 보고 느낀 것을 얘기해달라고 부탁하자 매우 고통스러워하시면서 며칠 말미를 달라고만 했다.

약속한 날이 되자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 무덤으로 갖고 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말이 오랫동안 뇌리에 맴돌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에 매우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본 것은 분명히 예사롭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 분은 어떤 때가 되면 말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인까. 지금이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분명히 정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공동체의 문제일까.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그 사이 그 분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도 커졌다.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서 한 발 물러서야 했다.

‘4·3진상보고서이후 많은 이의 증언이 쏟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찌 그 오랜 세월을 가슴에만 담아뒀을까 하는 일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4·3 당시의 일을 중심으로 자서전을 만들거나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도 감동을 준다. 다양한 이야기 방식 덕분에 우리는 역사를 더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며 그 속으로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것은 좀 더 폭넓은 증언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군 밑에서 아르바이트한 사람들이나 경찰들, 군인들 등의 증언들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또한 이를 테면 수용소에 갇혔을 때 혹은 동굴 속에 숨어 살 때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것들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다시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직 때가 안 된 것일까. 아직도 모든 것을 말하기에는 뭔가 꺼려지고 두려운 것이 있는가.

4·3 70주년을 넘기고 당시의 생존자들은 이미 말년에 접어들었다. 정말 무덤까지 갖고 갈 결심이 아니라면 말해야 한다.

개인의 기억이 곧 역사적 실체는 아니다. 역사적 실체란 자기가 겪은 것이 실체라고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이 모이고 쌓여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닐까.

그래야 개인의 기억은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통찰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일찍이 현기영 선생이 말한 대로 제주에서 생애사 정리는 4·3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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