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당시 ‘4‧28 평화회담’ 주도 김익렬 연대장 첫 추모제
4‧3당시 ‘4‧28 평화회담’ 주도 김익렬 연대장 첫 추모제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9.04.28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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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국립현충원서 재경제주4‧3유족청년회 주최
양조훈 이사장, 4‧3유족들 등 참석, 제주식 제사방식으로 고인 추모

제주4‧3 당시 제주도민들에 대한 공권력의 무자비한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이른바 ‘4‧28 평화회담’을 주도한 김익렬 연대장(1921~1988년 12월10일)에 대한 첫 추모제가 27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렸다.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청년회가 주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사)제주4‧3범국민위이 후원으로 개최된 추모제에서는 양조훈 4‧3재단 이사장, 백경진 재경4‧3청년유족회 고문을 비롯 유족청년회원, 제주와 서울 등의 4‧3유족 등이 헌화와 추념글 낭독 후 제주의 제사형식으로 뜻을 모았다.

김익렬 연대장은 제주4‧3당시 제주로 부임, 국가의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신분에서 좌익용공으로 내몰린 제주도민들에 대한 희생을 막기 위해 무장대를 이끌었던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통해 당시 상황을 평화적으로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의 강경파에 결국 평화회담은 좌절됐고 김익렬은 해임, 제주4‧3은 비극적인 국가폭력으로 이어져 제주도민들의 엄청난 피해로 이어졌다.

김 연대장은 회고록을 통해서도 제주4‧3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미군정과 당시 이승만 정권의 책임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김익렬의 회고록 중)

경남 하동출신의 김익렬은 고베상업학교를 수료한 후 학도병으로 후쿠지야마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과를 졸업, 일본군 소위로 복무하다 해방 후 귀국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해 1947년 9월 제9연대장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된 후 4‧28평화회담 이후 해임됐다가 제13연대장으로 발령, 한국전쟁당시 참전했으며 1967년 5월 국방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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