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한반도 분할이 처음 논의되다
임진왜란, 한반도 분할이 처음 논의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4.1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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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울 고문헌 박사·논설위원

지정학으로 보는 한반도-한반도 분단 극복을 위하여(1)

세계사에서 한반도의 중요성은 세계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힘의 충돌을 일으키면서 부각됐다. 곧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의 충돌이다. 이 갈등의 끝은 물론 전쟁이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지구는 본격적인 세계사 단계로 진입한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곳이다. 대륙 세력에게는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고, 해양 세력에게는 대륙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거점이자 교통로다.

사실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 있어 근대 이전까지는 세계사의 풍파에서 벗어나 있었다. 동북아 지역의 전쟁에는 여러 차례 휘말렸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멀리 떨어져 있던 세력들이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한반도에서 충돌한다. 대륙 세력으로는 중국과 러시아를, 해양 세력으로는 일본과 영국, 미국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세계 도처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충돌을 빚었는데, 그 중 한 곳이 한반도였다.

그렇다면 한반도 분할에 대한 논의는 언제 처음 시작됐을까. 바로 임진왜란 때다.

100여 년의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계 정복이라는 망상을 꿈꾸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일본에게 조선은 침략의 목표가 아니라 대륙 진출을 위한 길목이었다. 먼저 일본은 같이 연합해 명나라를 치자고 요구했으나, 조선은 명나라와 군신 관계와 부자 관계를 유지하며 한 가족처럼 지내왔기 때문에 부당하고 어리석은 군사작전 계획에 동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 측이 내세운 명분이 입명가도(入明假道)’, 우리는 명나라로 들어갈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15924월 일본군이 부산으로 침입, 5월 서울에 어어 평양까지 함락시켰다. 그러자 7월 명군이 개입하게 된다.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9월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됐다. 여기서 대동강을 경계로 한 조선 분할안이 처음 제기됐다. 명에게 대동강은 요동 방어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이었다.

159317일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16일 고니시 군은 한성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득의양양하게 한성으로 남진하던 명군은 26~27일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일격을 당하게 된다.

다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강화 교섭이 재개됐다. 조선은 배제된 상태에서 명과 일본 양측이 사신을 파견하며 절충이 시작됐다. 5월 명 사신이 일본으로 건너가 히데요시를 만난다. 여기서 히데요시는 조선 분할안을 다시 제시했다. 조선 8도 중 남부 4도를 일본에 할양하라는 요구였다. 명과 일본은 조선이 명의 속국이라는 인식 하에 일본이 전쟁으로 점유했던 속국의 땅 4개 도와 한성을 조선 국왕에게 돌려보낼테니 나머지 4개 도는 일본에 할양해 달라는 요구였다. 조선 국왕에게 돌려줄 4개 도는 속국 조선의 종주국인 명에 돌려주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명에서조차 조선 분할이나 직할 통치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병부 급사 중 위학증은 조선이 이미 제대로 왜적을 막지 못해 중국에 걱정을 끼쳤으니, 마땅히 그 나라를 둘이나 셋으로 나눈 뒤 능히 왜를 방어하는 자에게 줘 중국의 울타리가 되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요동총독 손광은 과거 원의 정동행성과 같은 기구처럼 명의 순무사가 조선의 군신을 행성에 소속시켜 직접 통치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더욱 황당한 건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슨 명군이 있어야 불측한 자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옹졸한 군주인가.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생명이 백척간두에 걸린 상황에서 일신의 보전만을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후 강화는 결렬됐고, 히데요시의 욕심대로 조선 분할이 이뤄지지 않자 일본은 조선을 재침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명나라 정복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조선 남부지역만이라도 차지하자는 속셈이었다.

일본에게 한반도는 대륙 진출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거점이었다. 그리고 명군의 참전 목적이 조선 보호가 아니라 일본군의 요동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듯이, 중국에게는 한반도가 해양 세력의 대륙 진출을 막기 위한 방어벽이자 완충지대였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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