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의 길
산티아고 순례의 길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4.1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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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 전 제주일보 논설고문·논설위원

산티아고 순례는 나의 오랜 로망이다.

순례길을 다녀온 이들의 가슴 절절한 사연을 접하면서 오래 전부터 꿈을 키워왔으니 그 꿈은 꽤 오래됐다.

지난 연말부터 제주 올레길을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를 대비한 훈련 겸 내 고향 제주를 눈 속에 넣어 가기 위함이었다.

나름 통과의례로 치른 순례 전의 행사라고나 할까. 그렇지 않았다면 그 많은 산길과 들길, 해변길을 걸어볼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이 드신 처형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옹포리 처갓집 동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묵은성 탑바래(탑동)를 지날 때는 갖은 회한으로 먹먹한 가슴을 안고 걸어야 했다. 35년을 살았던 집은 식당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고, 골목길 안집은 초가 대신 슬레이트를 이고 있었다. 검은 먹돌이 지천으로 깔리고 자릿배가 항시 닻을 내리던 곳, 해녀들의 호오이 날숨소리에 하루해가 지던 탑동 바다.

이젠 아무 것도 없고 퍼런 바다뿐이었다. 놀이터였던 원담은 흔적이 없고 용천수는 말라 버렸다. 촉광 높은 불빛으로 어린 눈을 부시게 했던 여름날의 멸치 배들도 사라졌으리. 호텔과 대형 마트만이 바다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바다를 이웃해서 살았던 사람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바다가 매립되면서 동으로 서로 갈라졌다. 바다를 가슴에 새겨놓은 사람들만 남았다. 그것마저 한 세대로 끝나리라. 인연과 사연도 희미해졌고 기억도 바다와 함께 매립된 것이다.

숱한 이들이 걸었던 내 고향 올레길.

토박이 길 나그네에게도 새로운 모습이었다. 들꽃, 오름, 곶자왈, 골목길마저 다 변해 있었다. 성치 않은 곳이 없었다.

하기야 제주의 환경이라고 언제까지 한결같을 수 없잖은가. 우리가 달라짐에 우리가 살아온, 살아갈 환경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올레길에 대한 지고한 애정은 걷는 시간이 늘수록 커갔다. 길을 내어준 모든 이에게 감사하고 감사하며 걸었다. 그럼에도 올레길에는 줍고 버리고 치워야 할 것들이 적지 않았다.

책상물림 공복이 많아서 그런가. 점점 무디어 지고 있는 행정의 무관심에 속 터질 것 같은 곳도 올레길이다. 눈을 조금만 돌려도 숨어있는 쓰레기가 크게 보일 터. 거리 구간표시는 왜 인색한지. 쓰레기 집하장으로 변한 화장실을 보면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산티아고 순례를 생각한 것은 무슨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남들 따라간다기 보다 육십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면서 살아온 만큼 나를 돌아보고 싶었다. 800에 이르는 순례길을 30여 일 동안 걷다 보면 자기성찰의 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산티아고만의 매력이다. 산티아고는 기쁨의 길이며 화해와 용서의 길이라고 말한다. 오래 걷기 위해서는 배낭의 무게를 덜고 또 덜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을 비워야만 화해와 용서의 길, 기쁨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인간의 무지, 그리고 오만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 제주 자연을 위해 인간은 자연에 화해를 청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진지한 자기성찰이 가장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길을 넓히고 건물을 높이고 공항을 늘리고 관광객을 많이 받는 것만이 능사인지를 자꾸 물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제주의 위기에 대한 대안은 종종 제시돼 왔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힘 있는 자들의 반대와 힘없는 자들의 무관심 때문이다. 신선한 공기와 혈액을 공급해야 할 폐와 심장 혈관은 동맥경화로 제기능을 상실했고, 해독해줄 간은 점점 굳어가고, 위와 장은 소화력을 잃어 흐름이 막힌 상태인 것이 제주다.

노폐물을 마지막으로 걸러주는 기관인 신장조차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산티아고 순례는 자연에 대한 화해의 길이다. 자연에 다시 용서를 청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는 지금의 길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제주는 다시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순례의 배낭을 메고 40여 일의 장정에 오른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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