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9.04.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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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한창이라 온갖 꽃이 만발하고 있다. 마치 봄은 꽃을 위해 있는 듯하다.

철 따라 꽃이 피지만 따스한 봄기운을 받으며 만개한 봄꽃은 유난히 아름답고 애착이 간다. 언 땅 밑에서 오랫동안 움츠러들었던 생명이 다시 소생하면서 살아있다는 의미를 깨우쳐주고 있어 더욱 그런 것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봄꽃은 번잡한 일상에서의 여유와 낭만을 준다.

지금 제주는 꽃축제 시즌이다. 벚꽃축제에 이어 유채꽃축제가 이어지고 동백꽃축제도 열리고 있다. 하양, 빨강 철쭉이 흐드러지고 올해 여름꽃 수국은 두 달이나 먼저 피었다. 이런 화창한 봄날엔 역시 꽃놀이가 제격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산에 들에 가면 꽃바람 꽃향기에 마음까지 빨갛게 꽃물이 드니까.

 

꽃놀이하면 조선 후기 문신 권상신(權常愼, 1754~1824)이다.

그는 17843(음력) 어느 날 벗들에게 남산에서 꽃놀이를 제안했다. 비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벗의 말에 그 규약을 정한 남고춘약(南皐春約)’을 유기(遊記)에 남겼다. 꽃놀이에는 날씨 핑계를 대지 말자고 했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거나 바람이 불어도 개의치 말고 가자는 것이다.

비가 오면 어쩌냐고? 빗속에 노니는 것은 꽃을 씻어주니 세화역(洗花役)이라 했다. 안개가 끼면 또 어쩌냐고? 안개 속에 노니는 것은 꽃에 윤기를 더해주니 윤화역(潤花役)이라 했다.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 노니는 것은 꽃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하여 호화역(護花役)이라 했다. 세화를 하던 윤화를 하던 호화를 하던간에 꽃놀이 가자고 했다.

꽃놀이 길에선 보조를 맞춰 걷자는 규칙도 붙였다. 만약 이를 어기면 벌칙이 주어졌다. 봄날 선비들의 꽃놀이 풍경이다.

 

꽃은 꺾어 머리에 꽂고/잎은 꺾어 초금불고/구경가세 구경가세/만고장판에 구경가세.”

원래 꽃을 머리에 꽂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민요를 들으면서 잎은 꺾어 초금불고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버들피리나 보리피리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을 듯싶다. 초금은 초적의 다른 표현으로 우리말로는 풀피리인데 버들피리나 보리피리와는 다르다. 나뭇잎을 살짝 접어 부는 것으로 청아한 소리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풀잎 악기가 500여 년 전에는 정규 악기의 하나로 어엿이 쓰였다는 점이다.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에는 향악기 7가지 중 하나로 이 초적이 들어있다.

나뭇잎 그림과 해설까지 곁들인 것을 보면 당시에는 우리 음악 연주에 풀피리가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뭇잎이 단단하고 두꺼우면 다 쓸 수 있지만, 귤이나 유자 잎사귀가 더 좋으며 복숭아나무 잎이나 갈댓잎을 말아서 쓰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귤 잎사귀를 접어 입에 물고 휘파람 불듯 하면 그 소리가 맑게 진동한다는 연주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배우는데, 선생이 필요치 않다고 하는데, 나도 한 번 귤잎을 따다가 과수원 길에서 불어볼까.

 

꽃놀이 갔다 오면 소매에 향기가 가득해지는 봄이다. 봄꽃은 또 사랑과 평화, 인정과 꿈을 은연중에 우리에게 가르친다. 보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꽃은 봄꽃이라고 하는 건가. 세상사가 들쭉날쭉해도 봄꽃은 언제 봐도 푸근하다.

한라산은 벌써부터 야생화 축제가 시작됐다. 산과 들에 벌어지는 개화 잔치,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에 마음은 쿵쾅쿵쾅이다.

조선 세종 때 대궐을 지키던 어느 용맹한 장군은 긴 칼을 차고, 봄날에 매화 꽃가지를 꺾어서 투구에 꽂았다. 서거정(徐居正)필원잡기(筆苑雜記)’에 나오는 진주 사람 하경복의 이야기다.

이번 주말에는 고사리 꺾기대회에 가서 하경복처럼 야생화 몇 송이를 모자에 꼽아 멋을 부려볼까. 그러면 이 세상이 다 내 것 같지 않을까.

세상이 시끄러워도 꽃은 피고 있다. 정국이 어지럽고 경제난이다 취업난이다 해서 우리 마음이 어수선한데, 꽃놀이를 가서 다소나마 위안을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날씨 핑계 대지 말고.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kangm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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