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궤짝 속 우리네 삶의 흔적들
오래된 궤짝 속 우리네 삶의 흔적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4.1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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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증·거치예금증 등

주민등록증 이전 신원 파악 증서 등
1950년대 시대상 반영한 자료 눈길
1955년에 제주도에서 발행된 도민증 앞뒤 속지.
1955년에 제주도에서 발행된 도민증 앞뒤 속지.

우리 주변에 있는 골동가게에서 제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궤짝일 것이다. 어릴 적 시골집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 들어가면 언제나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가구. 어른들이 집안 일을 상의하면서 관련된 문서를 찾거나 뭔가 귀중한 것들을 찾을 때면 그 때서야 자물쇠를 열고 뒤적이던 놈. 내 기억 속 궤짝은 집안에서 뭔가 은밀하고 중요한 게 들어있는 금고 같은 존재였다.

그랬던 궤짝들이 요즘은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거 같다. 물론 사오기나 굴무기 같은 제주산 좋은 나무로 만든 궤짝들은 옛날 거든 신작이든 간에 여전히 인기가 있지만, 재질이 무르거나 해서 벌레가 잘 먹는 나무거나 나왕으로 만들어진 궤짝들은 종종 클린하우스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제주로 와서 처음에는 공간이 부족한 관계로 궤짝 모을 생각은 못 하고 그 안에 남겨져 있던 종이뭉치 등을 수집하곤 했다. 그 뭉치 속에는 옛날 어른들이 살았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포함돼 있어 지금도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다. 그것이 경제적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만으로는 따질 수 없는 우리네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필자의 관심을 아는 분들이 전 주인이 필요 없다고 내친 궤짝 속에서 나온 종이뭉치를 모았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라고 주시곤 한다.

엊그제도 우리 제주에서 목공예 명장(名匠)으로 유명한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찾아뵙고 살펴보니 몇 가지 재미있는 자료가 그 속에 있었다.

먼저 1955년에 제주도에서 발행된 도민증이 있었다. 이 도민증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내 질서가 혼란하고 월남한 많은 북한 동포들의 신원파악이 어려운 상황 하에서 국내의 반국가적 행위자를 색출하고 도민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해 1950년부터 발급된 증서로, 1962년부터 지금의 주민등록증 제도로 대체된다. 소속정당이나 한글해독 여부를 표기하는 게 이채롭다.

1954년 제주금융조합에서 발행한 거치예금증서 속지.
1954년 제주금융조합에서 발행한 거치예금증서 속지.

1954년 제주금융조합에서 발행한 거치예금증서도 눈에 띈다. 해방된 지 10년차인 당시에도 쇼와(昭和) 연호가 찍힌 일본어로 된 증서를 여전히 사용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의 물자부족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農民(농민)自發的意思(자발적의사)로써組織(조직)하려는大韓農民會(대한농민회)’創設(창설)()한 일이라는 제목이 붙은 인쇄물이 있었다. 해방 후 최대의 농민조직인 전국농민총연맹에 대항하기 위해 1947년 조직된 대한독립농민총연맹이 1952년에 바꾼 이름이 바로 이 대한농민회이다.

農民(농민)의自發的意思(자발적의사)로써組織(조직)하려는‘大韓農民會(대한농민회)’創設(창설)에關(관)한 일 앞면.
農民(농민)의自發的意思(자발적의사)로써組織(조직)하려는‘大韓農民會(대한농민회)’創設(창설)에關(관)한 일 앞면.

 

이 인쇄물의 서두에는 大統領閣下(대통령각하)諭示(유시)農林部長官勸告(농림부장관의권고)’라는 말이 붙어있어 자발적 의사로써 조직하려한다는 취지를 무색케 한다. 맨 뒷부분에 一切共産惡黨(일절공산악당) 또는 이에가까운 不純分子(불순분자)各自徹底(각자철저)審査(심사)하여 完全除去(완전제거)할것이라는 특기사항이 첨부되어 있어 한창 전쟁 중이던 당시 분위기와 그 조직 목적이 농민의 권익 보호를 위한 농민운동에만 있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요즘 책 수납용으로 모은 궤짝 안에는 옛날 광고나 신문 등이 붙어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제 궤짝은 단순한 옛 가구가 아니라 내겐 마치 타임캡슐과 같은 존재다.

그 소중한 삶의 흔적들을 주신 그 명장님께 조만간 소주 한 잔 대접해야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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