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제주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려
“그들(서북청년단)은 눈앞에서 제 어머니를 총살했습니다.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전기고문과 물고문 후유증으로 수면제를 먹어도 하루에 한두 시간 밖에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제주4‧3 71주년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명예회복이나 보상으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피해 생존자들이 겪었던 충격과 아픔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자리가 마련됐다.
(사)제주4‧3연구소는 지난 29일 제주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여덟 번째 제주4‧3증언본풀이마당을 개최했다.
‘그들 속의 4‧3 그 후 10년: 나는 4‧3희생자입니다’를 주제로 이어진 본풀이마당은 국가로부터 4‧3희생자와 후유장애자로 인정받지 못한 김낭규 할머니(79)와 강양자 할머니(77), 정순희 할머니(84)가 증언자로 나섰다.
김 할머니는 “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총살당했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연좌제로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잃었다. 어머니 시신엔 손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 있던 아버지의 위패는 4‧3희생자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려졌다”고 당시 아픔을 회상했다.
김 할머니는 “위패가 없는 걸 보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버지 산소에 가서 울고, 집에 와서도 3일을 계속 울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고 항일운동도 했다”며 “아버지가 4‧3희생자로 인정받는 그날까지 신청을 계속할 것”이라고 명예회복에 대한 의지도 내비쳤다.
두 번째 증언에 나선 강 할머니는 6살 때 4‧3 당시 밭에 나갔다 행방불명된 외할아버지를 찾아다니다 돌무더기에 깔려 평생을 허리가 휘어진 채 살았다. 외할머니와 외삼촌도 희생됐다.
강 할머니는 “나는 4‧3희생자로 인정됐지만 결국 후유장애는 인정받지 못했다”며 “나는 4‧3으로 장애를 얻었다. 내가 왜 구차하게 후유장애를 거짓으로 신고하겠나. 정부에서 신고하라고 해서 신고했는데 인정하질 않으니 ‘국가가 날 의심하는 구나’라는 생각부터 앞선다”며 억울한 심경을 밝혔다.
정 할머니는 불과 13살 나이에 도피자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북청년단에 의해 전기‧물고문을 당하고 어머니가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총살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언니와 나도 붙잡혀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애들은 아무 죄 없는데 쏘지 말라’고 해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며 “고문 후유증으로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수면제를 먹어도 한두 시간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할머니는 후유장애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 할머니는 “지난해 정부가 후유장애 신고를 받는다 해서 병원에 갔지만 의사가 ‘몸에 총알이 박히거나, 손이 끊기거나, 다리가 잘리는 수준의 상처여야 한다’며 거절당했다”며 “4‧3으로 인해 억울했던 것을 다 풀어준다더니 제약이 너무 많다”고 토로했다.
김나영 기자 kny8069@jejuil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