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간첩 누명 벗고 떳떳해졌다”
“억울한 간첩 누명 벗고 떳떳해졌다”
  • 홍수영 기자
  • 승인 2019.03.27 2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순석 할머니, 불법 군사재판 무죄 입증 이어 4·3희생자 뒤늦게 인정
박 할머니, 우리나라를 '조선'으로 통역해 간첩으로 낙인…자녀 피해 우려해 침묵해와
박순석 할머니 인터뷰        임창덕 기자
71년 만에 제주4·3희생자로 인정 받은 박순석 할머니가 27일 아들 임용훈씨 자택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임창덕 기자

“70년 동안 말도 못하고 가슴 속에 담아두고 살았는데 이제 떳떳해졌어요.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박순석 할머니(91)에게 2019년은 잊지 못할 한 해가 됐다. 억울하게 간첩누명을 쓰고 옥살이까지 했던 박 할머니는 지난 26일 제주4·3희생자로 뒤늦게 인정받게 됐다.

지난 117일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청구 공소 기각으로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은 지 약 2개월만의 일이다.

박 할머니는 27일 오전 아들 임용훈씨에게 4·3희생자로 인정받게 된 사실을 전해들었다.

이날 아들 임씨 집에서 만난 박 할머니는 연신 정말로 감사드린다고 인사하며 상기된 얼굴로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박 할머니가 뒤늦게 4·3희생자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본인의 간첩낙인이 자식에게 피해가 될까봐 4·3 사건 당시 겪었던 일에 대해 침묵해온 탓이다.

박 할머니는 영감한테는 다 말했지만 아이들에게는 누가 될까봐 말도 못했어요. 그런 일을 어떻게 얘기합니까.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있지요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박 할머니는 제주4·3도민연대에서 4·3수형인 명부를 토대로 생존수형인을 찾는 과정에서 연락이 닿으면서 과거사를 가족들에게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열여섯 살 간호사가 되고 싶은 꿈 많은 소녀였던 박 할머니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방이 되면서 제주로 돌아왔다. 박 할머니는 1948년 우체국 국제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면서 통화내용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번역 중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이라고 통역한 일이 화근이 됐다. 경찰은 이를 두고 박 할머니를 간첩으로 간주해 집으로 들이닥쳤다.

박 할머니가 이를 피해 도망나온 것이 수개월간의 산 속 생활의 시작이었다. 박 할머니는 열안지오름, 거문오름 등에서 생활했지만 사람들과 하산하다가 군대에 잡히게 됐다.

박 할머니는 당시 같이 잡혔던 친구들은 총살당해 죽었어요.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참 기가 막힐 일이지요. 경찰들이 저한테 총을 들이대면서 폭도년, 간첩, 스파이라고 막 그러고. 그게 아직도 참 많이 억울합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4·3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1949년 불법 군사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박 할머니는 전주형무소에서 약 5개월간 복역했다. 다시 제주로 돌아왔지만 가슴에 말 못할 한을 짊어진 채 살아온 세월이었다.

박 할머니는 어디에 무슨 일만 생겨도 경찰이 저를 계속 잡아갔어요. 영감은 다 알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도저히 말을 못하겠더군요라며 4·3희생자 사실을 숨겨온 이유를 설명했다.

박 할머니는 4·3희생자로 인정받은 사실을 알고 요양병원에 있는 남편 생각이 났다.

박 할머니는 남편 앞에 가서 만세를 부르고 싶다나를 다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를 글로 써준다고 했는데 몸이 아파 요양병원에 간 후로 얼굴도 못 보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박 할머니는 다른 4·3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우리 이제 더 이상 남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 힘내시길 바란다이제 법으로도 우리의 억울함을 알아주고 4·3이 역사적으로 남게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소회를 전했다.

홍수영 기자  gwin1@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