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할머니, 우리나라를 '조선'으로 통역해 간첩으로 낙인…자녀 피해 우려해 침묵해와
“70년 동안 말도 못하고 가슴 속에 담아두고 살았는데 이제 떳떳해졌어요.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박순석 할머니(91)에게 2019년은 잊지 못할 한 해가 됐다.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옥살이까지 했던 박 할머니는 지난 26일 제주4·3희생자로 뒤늦게 인정받게 됐다.
지난 1월 17일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청구 ‘공소 기각’으로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은 지 약 2개월만의 일이다.
박 할머니는 27일 오전 아들 임용훈씨에게 4·3희생자로 인정받게 된 사실을 전해들었다.
이날 아들 임씨 집에서 만난 박 할머니는 연신 “정말로 감사드린다”고 인사하며 상기된 얼굴로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박 할머니가 뒤늦게 4·3희생자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본인의 ‘간첩’ 낙인이 자식에게 피해가 될까봐 4·3 사건 당시 겪었던 일에 대해 침묵해온 탓이다.
박 할머니는 “영감한테는 다 말했지만 아이들에게는 누가 될까봐 말도 못했어요. 그런 일을 어떻게 얘기합니까. 하지만 이제는 엄마가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있지요”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박 할머니는 제주4·3도민연대에서 4·3수형인 명부를 토대로 생존수형인을 찾는 과정에서 연락이 닿으면서 과거사를 가족들에게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열여섯 살 간호사가 되고 싶은 꿈 많은 소녀였던 박 할머니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방이 되면서 제주로 돌아왔다. 박 할머니는 1948년 우체국 국제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면서 통화내용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번역 중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이라고 통역한 일이 화근이 됐다. 경찰은 이를 두고 박 할머니를 간첩으로 간주해 집으로 들이닥쳤다.
박 할머니가 이를 피해 도망나온 것이 수개월간의 산 속 생활의 시작이었다. 박 할머니는 열안지오름, 거문오름 등에서 생활했지만 사람들과 하산하다가 군대에 잡히게 됐다.
박 할머니는 “당시 같이 잡혔던 친구들은 총살당해 죽었어요.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참 기가 막힐 일이지요. 경찰들이 저한테 총을 들이대면서 폭도년, 간첩, 스파이라고 막 그러고. 그게 아직도 참 많이 억울합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4·3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박 할머니는 1949년 불법 군사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박 할머니는 전주형무소에서 약 5개월간 복역했다. 다시 제주로 돌아왔지만 가슴에 말 못할 한을 짊어진 채 살아온 세월이었다.
박 할머니는 “어디에 무슨 일만 생겨도 경찰이 저를 계속 잡아갔어요. 영감은 다 알았지만 아이들에게는 도저히 말을 못하겠더군요”라며 4·3희생자 사실을 숨겨온 이유를 설명했다.
박 할머니는 4·3희생자로 인정받은 사실을 알고 요양병원에 있는 남편 생각이 났다.
박 할머니는 “남편 앞에 가서 만세를 부르고 싶다”며 “나를 다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를 글로 써준다고 했는데 몸이 아파 요양병원에 간 후로 얼굴도 못 보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박 할머니는 다른 4·3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우리 이제 더 이상 남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떳떳하게 살 수 있다. 힘내시길 바란다”며 “이제 법으로도 우리의 억울함을 알아주고 4·3이 역사적으로 남게 되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소회를 전했다.
홍수영 기자 gwin1@jejuil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