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주
주름·진주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03.0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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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숙 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숙명여대.가천대 외래교수

삶이 하나의 여행인 줄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여기며 어떤 여행을 떠나든 그건 그 사람의 몫인 것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째 아이가 느릿느릿, 때론 예기치도 않았던 행동을 보일 때면 난 그 아이에게 “왜 남들과 같은 여행을 하지 않느냐”며 닦달했다.

첫째 아이는 아마 자신이 떠나는 여행길에 손을 내밀어 줄 파수꾼이 필요했었을터인데…. 자꾸 어긋나는 첫째 아이와 나의 마음을 느끼며 내가 안다고 믿었던, 잘할거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 주변에 있었던 가족, 친구들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의 공통점은 ‘삶의 주름진 시간만큼 그 의미는 더욱 값질테니’였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주름이 깊디깊어 진짜 꼬부랑 할머니가 되겠다’는 씁쓸한 마음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을 난 마음으로도 충분히 인정한다. 주름 곳곳에 삶의 여행을 통해 직접 부딪치며 캐낸 영롱한 진주가 빼곡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주변 소중한 이들이 내게 전해주는 사랑의 격려에 힘입어 그 힘을 첫째 아이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려했다. 그 아이의 길고 느린 방황의 시간을 주름 속에 진주가 영글고 있는 시간이라 믿으며 닦달을 내려놓고 함께 버티어 보았다.

서서히 첫째 아이는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어두워질 땐 등불도 켜고 밝은 길에서는 조금씩 속도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루었고 합격까지 대기번호 4번을 받아 놓고 기다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불합격 통지를 받은 후 이제 재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가 재수를 하면서 엄마인 내게 부탁한 것은 “도시락을 싸줄 수 있어요?”였다.

“도시락?” “예, 엄마가 싸준 도시락으로 하루 중 한 끼를 해결하고 싶어요.” “아? 그래? 해볼게. 대신 메뉴는 골고루다. 엄마가 싸준 것은 일단 남김 없이 먹어야해.”

첫째는 끄덕였다. 나도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서로 처음 맞이하는 시간의 서툼을 충분히 인정하고, 넘어져도 잠시 그대로 두거나 이내 일어날 것을 믿는다는 신호다. 그것이 신호임을 이젠 안다. 그렇게 첫째 아이의 재수 생활과 그동안엔 없었던 나의 도시락 싸기 생활이 이주일쯤 지나며 지금 즈음에 이르렀다.

새봄, 새 학기를 맞아 강의가 시작되었고, 난 어김없이 첫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는 느리거나, 빠르거나, 처음이거나, 혹은 다시 해보거나의 여행을 하는 푸릇한 여행자들이 반짝이는 눈망울을 하며 앉아 있었다. 순간 눈이 부셨다.

늘 하던 강의였고, 어쩌면 내 아이는 이번에 합격하지 못한 터라 섭섭한 마음이 들어 덤덤하게 보낼 수도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유난히 눈이 부셨다. 아! 순간 알아차렸다. 내 안의 주름 곳곳에 숨어 있는 진주들이 영롱하게 불을 밝히고 있구나 하고.

그 불빛을 받으며 난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제각각의 여행길에서 서로 만난 반가운 인연들이라 여기며 다가갔다. 단지 다소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 믿음직한 안내자의 마음이 되어 꼭 필요한 지점을 짚었다.

귀한 인연들인지라 시간을 아끼듯 만났다. 한 호흡 한 호흡을 서로 나눈 듯 하다. 첫날이라 ‘빨리 끝나겠거니’하고 무릎에 가방을 얹어 금방이라도 나갈 듯이 앉거나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듯 앉았던 학생들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대며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참 빨리 갔다.

어렵다고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면 나도 이제 그 이에게 노래 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주름 속 진주가 영그는 귀한 시간이니,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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