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세우려면
버스를 세우려면
  • 정흥남 편집인
  • 승인 2019.03.1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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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우리말 가운데 볼모라는 단어가 있다. 국어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한 담보가 되어 상대편에게 억류된 사람쯤으로 정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으로 종종 사용된다.

최근 대한민국 전체를 소용돌이로 몰고 갔던 이른바 한유총의 유치원 개학 연기 투쟁에서 이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유치원 개학 연기라는 투쟁이지만, 실제 내용은 어린 아이들의 유치원 돌봄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 나아가 목적 달성을 위해 순수한 어린 아이들을 볼모로 잡았다는 비난이 봇물처럼 터졌다. 결국 한유총은 백기 투항했다.

제주에서 또다시 볼모라는 단어가 부상했다. 이번엔 볼모가 유치원생이 아니라 등·하교 때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학생과 고령 주민. 다름 아닌 실제적 교통약자가 됐다. 버스가 파업하게 되면 결국 이들이 볼모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내 버스노조가 임금협상이 결렬되자 당초 그제(13)부터 버스 운행을 중단하는 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조합원 96%가 파업에 찬성했다. 가까스로 임금인상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버스 파업은 일어나지 않았다.

버스 파업은 철회됐지만, 그 후유증이 남긴 생채기가 너무 크다.

 

#지방정부 연간 1000억원 재정 지원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제주에서 버스사업은 그런대로 할 만한 사업의 범주에 들어갔다. 그런데 1990년대 들면서 일반인의 승용차 구입이 보편화한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자연스럽게 버스사업은 내리막길로 들어갔다.

적지 않은 회사들이 폐업의 위기를 맞았고, 실제 문을 닫는 업체가 잇따랐다.

자연스럽게 회사는 운전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고, 상당수 운전자는 물 좋은 곳인 관광버스(전세버스)로 발길을 돌렸다.

버스산업 위축으로 시 외곽 변두리에 거주하는 차 없는 서민들이 통행권을 침해받는 상황이 나왔고, 이 과정에서 공영버스가 등장했다. 나아가 공영버스가 담당하지 못하는 결손 노선을 운행하는 민간회사에는 결손액을 보전한다면서 손실을 채워줬다.

16개월 전인 20178월 제주도의 이른바 대중교통체계 개편으로 제주 버스산업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맞았다.

핵심은 버스 준공영제다. 민간에 운영권은 주되 적자는 행정이 보전해 주는 것이다.

제주도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버스 준공영제에 1000억원의 재정을 지원한다. 이 가운데 56%가 버스기사 인건비다.

 

#교통약자 볼모 파업 공감 못 얻어

노동조합이 단체협상 특히 임금협상 결렬로 적법한 쟁의행위를 하는 것을 관련법이 보장한 노동조합의 고유 권리다.

그런데 쟁의행위의 마지막 선택인 파업에는 많은 고민이 따라야 한다. 그 게 교통약자 또는 사회적 약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버스 종사자들에 대한 인건비는 준공영제 시행으로 올랐다. 제주지역 버스기사 임금은 전국 평균보다 크게 높다. 준공영제 시행으로 1년차 연봉이 4300만원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준공영제 시행 16개월 만에 두 자릿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겠다면 얼마나 많은 도민이 이에 동의할지 스스로 돌아봐야 했다.

지난해 제주지역 버스 이용객은 연인원으로 6000만명이 넘어섰다. 도민 1인당 평균 1년에 100번 정도 버스를 이용했다. 이들 이용객의 대부분은 학생이고, 이어 노령층 주민들이다. 버스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런 약자를 볼모로 삼아 버스를 멈추겠다면 아무리 좋은 명분이라도 일반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다.

버스를 세우겠다면 혈세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먼저 선언해야 하고 그런 다음 봉급이 너무 작아 살 수 없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버스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무릎 꿇어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게 순서다.

그래도 교통약자를 볼모로 잡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정흥남 편집인 기자  kangm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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