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오래된 물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학창시절의 전공도 역사를 선택하게 되었고, 나이가 좀 든 지금은 아예 묵은 책을 취급하는 게 직업이 되었다. 관심이 전공이 되고 나중에는 생업이 된 셈이니 조금 넓게 보면 내 삶의 방향은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긴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같은 역사를 공부했거나 헌책방을 운영하는 다른 분들에게 누를 끼치는 걸 수도 있겠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지 좋아 하는 거려니’ 생각하시고 하해(河海)와 같은 마음으로 눈 감아 주시길 바란다.
헌책을 다루다 보면 책뿐만 아니라 옛날 문서나 편지, 그림, 글씨 등 다양한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이 함께 입수되곤 한다. 어느 댁 벽에 걸려있던 맘에 드는 글씨나 그림이 들어올 때면 그 작가가 알려진 분이든 아니든 간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소소한 기쁨이 피어오르고, 낡은 궤짝 속에 남아있던 오래 된 종이뭉치 속에서 옛날 어른들이 살아 왔던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발견할 때면 슬며시 미소 짓게 된다. 묵은 거면 다 좋아 하는 필자에겐 헌책방이 천직이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면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학창시절에 얻어 들은 얄팍한 지식에 기대어 하는 무모한 판단이지만, 때로는 다양한 삶의 편린 수준을 넘어서는 좀 더 의미 있는 자료들이 개중에 섞여있기 마련이다. 옛 것들 중에 소중하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마는 그 시대의 큰 흐름을 더 잘 읽을 수 있는 자료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을게다.
엊그제 새로 입수된 자료도 그런 경우이다. 두 건 모두 전라남도에서 발행된 팜플릿으로 1938년 발간한 ‘인구동태조사 질의응답집(人口動態調査質疑應答集)’과 1943년 5월에 발간된 ‘조선노동기술통계조사 및 인구동태조사 사무방면 타합회(打合會) 관계서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구 센서스(國勢調査)는 1925년에 이루어졌다. 원래 1920년을 목표로 계획이 진행되었지만 3·1운동의 여파로 연기되어 간이(簡易) 국세조사 형식으로 실시된 것이다. 이후 1930년, 1935년, 1940년, 1944년 등 총 5차례에 걸쳐 시행되었고, 1944년의 경우 조사 집계가 완료되기 전에 해방되어 정식 발표되지는 못했다.
이와는 별도로 1938년부터는 인구동태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같은 해 4월 일제가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해 제정·공포한 전시통제의 기본법인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과 관련이 깊다. 즉 식민지 조선의 인력을 징발해서 군수공장이나 광산 등에서 강제로 노역을 시키기 위한 기초자료로 이용하기 위해 실시한 조사였다. 따라서 그 조사의 신뢰도는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음에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41~43년 3회에 걸쳐 실시한 게 ‘조선노동기술통계조사’이다.
1946년에야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 하에서 벗어나게 된 우리 제주도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이 자료에는 첨부된 상황일람표에 ‘도(島)’였던 당시의 행정구역 명칭이 그대로 보인다.
요즘 한일관계의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강제징용 배상판결 문제이다. 그 명분 없는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 수탈당하고 죽어갔던 우리 조상님들의 한(恨)이야 말로 바로 그들이 말하는 ‘불가역적’인 것임을 아는 지 되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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