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통’ 만세
‘꼴통’ 만세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3.10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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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주 주필/부사장

6·25 전쟁 뒤 태어난 우리 세대는 최희준의 하숙생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르며 자랐다. 그리고 영화 러브 스토리를 보고 눈물도 흘렸다. 명문 부호의 아들인 대학생 올리버와 이탈리아 이민 가정의 가난한 제니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도 결혼한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두 사람. 마침내 올리버는 대학을 졸업, 변호사가 된다. 그러나 아내 제니가 죽음이 임박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쩔 줄 몰라하는 올리버에게 제니가 하는 말.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아직도 이 대사를 잊지 않고 기억한다.

또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에서 돈이 순결한 여자를 어떻게 농락하고 인생을 망가뜨리는지 확인했던 세대이기도 하다.

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한 신념도 각양각색이다. 2016년 겨울 촛불 집회에 나간 친구들과 탄핵을 반대하는 태극기 집회에 나간 친구들. 누구는 영화 변호인에 열광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국제시장보며 눈물을 떨궜다. 이제 이런 세대들은 보수건 진보건 꼴통소리를 듣는다.

꼴통이란 무엇인가. 사전에서 찾아보니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은 씨도 안 먹혀서 골치깨나 썩이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근본주의에 가깝다고나 할까.

독일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 gen Habermas)는 근본주의를 자기의 신념이나 근거가 합리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울 때조차도 그러한 신념이나 근거를 정치적 주장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고집스러운 태도로 정의한다.

꼴통은 과거엔 나이 들고 고집 센 사람들, 이른바 수구꼴통의 대명사였는데, 요즘엔 이념의 좌우를 넘어섰다. ‘진보꼴통이라는 말도 많이 쓰인다. 하여튼 꼴통이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꼴통을 잘 들여다보면 그 바탕엔 올리버와 제니가 눈싸움하던 날, 그 하얀 설원(雪原) 같은 순수(純粹)가 있다.

자기만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부분 꼴통들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있다. 원칙과 신념에 충실하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지는 행태를 취하기도 한다. 시장 원리로 보자면 도태돼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수꼴통과 진보꼴통, 이 두 세력이 적대적 공존내지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면서 도태되지 않고 승승장구 롱런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 보수꼴통이나 진보꼴통이 병립해서 사라지려야 사라질 수 없는 구도가 형성돼 있다는 얘기다. 꼴통이 번성하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건 우리 사회에 원칙과 지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을 보라. 자기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 그러한 기개가 있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선 사람들이나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선 사람들이 다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꼴통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취하지 않으면서 신념을 위해 모든 걸 거는 사람들은 지고(至高), 지순(至純)하다. 우리 사회엔 정치와 이념의 영역에만 꼴통이 있을 게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서 훌륭하고 착한 꼴통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청춘(靑春)은 말 그대로 푸른 봄이다.

누구나 청춘이 있듯이 사람은 살아가면서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다 보면 자기만의 원칙, 법칙, 룰이 생긴다. 꼴통이 돼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지키고 싶은 가치가 많아질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맞은 편 상대를 향해 보수꼴통’, ‘꼴통진보라고 비웃고, “정신 차리고 세상을 똑바로 보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안쓰럽다. 상대에게 꼴통이라면서도 정작 자신이 꼴통이라는 걸 모르고 있으니.

더욱 문제는 재주는 곰이 부리는데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데 있다. 진보의 탈을 쓴 보수, 보수의 얼굴을 한 진보. 그러고 보니 요즘 세상은 사이비 꼴통들이 기회를 꿰차고 득세하면서 정작 진짜 꼴통들은 나그네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속상해하지 말자. 꼴통도 어차피 나그넷길. 정처 없이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아야 한다. 꼴통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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