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을 하면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입수한 책들을 정리할 때 꼭 속표지를 펼쳐본다. 대부분 아무 것도 없지만 때로는 전 주인이 남겨놓은 간단한 소감이나 날짜 등이 적혀 있곤 한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저자의 친필 서명이나 메모, 그림 등이 담긴 책을 만날 수 있다.
그럴 때면 그 책의 저자가 무명작가이든 유명인이든 관계없이 바로 격리(?)해서 따로 관리한다. 품고 있는 글이야 어차피 다 같은 거지만 지은이의 손길이 한 번 더 육필(肉筆)로 남은 책이기 때문이다.
내용이 중요하지 육필이든 뭐든 저자의 서명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하실 분들도 계실게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은이가 직접 손으로 써서 남긴 몇 자의 필적에서 느낄 수 있는 그 훈훈함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토록 몇 글자의 친필 서명에도 설렘을 느끼는데 하물며 육필원고는 어떻겠는가? 지인이나 애독자에게 본인의 책을 주기 위해 쓰는 몇 자의 서명과는 다르다. 원고의 필체에는 그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고, 고치고 다시 쓴 흔적에서 그 창작의 고뇌와 주제에 대한 작가의 의식 변화과정을 볼 수 있다. 인쇄되어 출판된 책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작가나 작품에 관한 많은 것들을 파악할 수 있고, 육필만이 가지는 따스함과 친근함이 있다.
이런 육필원고는 출판된 책과는 달리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는 원고다. 보존을 위해 복사를 하거나 프린트를 한 건 그저 복사(출력)본일 뿐이다. 요즘처럼 대부분 컴퓨터를 이용해서 자판을 두들기고 파일로 저장해서 출판사에 전송하고 출판하는 시대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더 소중하다.
지금까지 우리 책방에 입수된 저자 친필 서명본은 제법 많지만, 육필원고와의 인연은 두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기억은 지난해 5월, 안타깝게도 지난해 11월에 작고하신 원로시인 문충성(文忠誠, 1938~2018) 선생님의 장서를 인수했을 때였다.
선생님의 육필원고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두 가지를 소개하자면, 먼저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인 ‘섬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문학과지성사, 1981)의 원고가 담긴 두툼한 노트를 들 수 있다. 단정하게 만년필로 쓴 원고 초고에 다시 만년필로 고치고, 또 다시 적·흑색 플러스펜으로 다시 수정하는 등 선생님의 창작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원고다.
다른 하나는 제목이 ‘토박이 시인이 엮어 쓴 제주관광 안내서-제주도를 찾아서’인 원고뭉치(200자 257매)로 1980년대 초반에 쓰신 원고이다. 도서출판 조약돌에서 출판예정이었다가 간행은 안 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자료를 엮은 앞부분의 세 장은 큰 의미를 둘 수 없겠지만, 마지막 장인 ‘시로 읽는 제주도 전설’(75매)에 수록된 자두치 정두령, 이어도를 찾아서 등의 작품은 시인의 등단시인 ‘제주바다’와 같이 ‘누이야’에서 ‘누이야’로 끝나는 형식으로 모두 선생님의 창작시인 것으로 보여 그 가치를 더한다.
단정한 선생님의 글씨체를 보고 있자니 요즘은 정말 보기 힘들어진 육필원고들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따스한 온기가 담긴 손글씨가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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