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봄 물도 새로 흐르고
한라산 봄 물도 새로 흐르고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9.02.24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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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던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가 지난 19일이었다.

이제 계절은 어느 덧 경칩(驚蟄, 36)을 향해 달리고 있다. 평안도 민요 수심가에는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리더니 정든 임 말씀에 요 내 속 풀리는구나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수에는 북쪽의 대동강도 녹을 정도니 남쪽나라 제주도는 더 말할 나위 없으리라.

아직 아침저녁으로 추위가 남아있지만 봄 날씨에 가깝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급하다. 서양시인은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했다.

동양에선 봄바람(花信風)소한(小寒)에서 곡우(穀雨)까지 부는 바람으로 정했다. 달력을 걷어보니 올해 소한은 16일이었고 곡우는 두 달 후 420일이다. 4월 곡우에 부는 바람은 봄바람이 분명하지만 1월 소한에 부는 바람을 봄바람이라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아니한가. 이처럼 사람들은 겨울에서 봄을 기다리고 설한(雪寒)에서 화신(花信)을 기대한다.

 

봄바람의 색깔은 분홍과 연두다. 연분홍 치마에 휘날리는 봄바람은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봄바람은 부드러운 어감과 달리 제법 변덕스럽다. 그런 만큼 이름도 다양하다. 하늘거리는 미풍이나 솔솔 부는 실바람’,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은 듣기만 해도 정겹다. 그러나 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과 옷섶을 파고드는 살바람은 아주 매섭다. 회오리처럼 부는 소소리바람이나 좁은 틈으로 불어 닥치는 황소바람못지않다.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 흘린다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리라.

바람이 아무리 변덕스러워도 계절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만물을 깨어나게 하고 새싹을 밀어 올리는 게 봄바람이다.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이 불면 다시 돋아난다(野火燒不盡春風吹又生)’고 하니까.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봄은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우리에게 온다.

 

학창시절 봄 춘()자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1년을 뜻하는 시간이나 어른의 높인 나이를 춘추(春秋)라고 부를까. 하동(夏冬)이란 말은 왜 안 쓰는 것일까. 공자는 사서(史書)의 이름을 왜 춘추라고 지었을까.

여름은 생명의 계절이지만 그 기세가 너무 등등하고 겨울은 성장을 멈추는 계절이라 기피 대상이 된다. 그러나 봄은 시작하는 계절로, 가을은 저장하는 계절로 존중 받는다는 음양사상을 알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청춘(靑春)이란 말도 원래 자연적인 계절을 가리키는 짙푸른 봄의 뜻이었다. 그것이 젊음의 뜻으로 비유된 것은 3세기 중엽 서진(西晉)의 시인 반니(潘尼)의 글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는 후배의 관직 진출을 축하하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이미 소추(素秋)지만 그대는 바야흐로 청춘일세.’ 이 때부터 소추는 늙은이의 뜻, 청춘은 젊은이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춘이라고 마냥일까. 어느 날 늙은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한가롭게 교외를 거닐다가 한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 볼품없는 늙은이가 바로 문명(文名)을 드날리던 그 소동파란 말인가 부귀영화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로구나노파는 장탄식했다. 일장춘몽이란 말은 여기서 시작됐다.

봄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울적하면 봄 같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봄이 와도 흥이 나지 않는 사람은 필자만이 아닌 것 같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꼰대로 몰리게 된 소추들에게나, 취업도 결혼도 포기했다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청춘들에게도 봄이 오는가. 이런 세상을 태평성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왜 이리 봄이 봄 같지 않은지.

하지만 봄 같지 않은 봄이라도 풀꽃들은 어김없이 싹을 틔우리라. 지난 주말에 오일시장에서 사와 심은 백합 구근들도 곧 싹이 솟아날 것이다. 한라산에는 봄물도 새로 흐를 것이고.

그렇게 경제도 정치도 부드럽게 풀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푸근한 마음으로 새 봄을 맞을 게 아닌가.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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