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보 기획] 항일운동 비밀결사 주도...'조선 독립' 물줄기 이뤄
[제주일보 기획] 항일운동 비밀결사 주도...'조선 독립' 물줄기 이뤄
  • 부남철 기자
  • 승인 2019.02.18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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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사회주의 항일운동 인물들
제주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송종현의 생전 모습
제주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송종현의 생전 모습

3·1운동 전후 제국주의 열강들한테서는 기대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 많은 젊은이들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신생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을 ‘최후의 희망처’이자 본보기로 여기 기 시작했다.

일제의 토지 수탈 등에 따른 농촌의 비참한 현실 과 갓 자라나기 시작한 노동자층의 존재도 사회주의운동 보급의 길을 넓혔다.

이 새로운 사상이 소비에트공화국에서 도래되면서 청년과 지식인층,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생겨난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은 1918년 연해주 에서 결성된 최초의 본격적인 사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시작으로 무장독립운동과 조직운동 등을 벌이며 독립운동의 큰 물줄기를 이뤘다.

이 시기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이 급속도로 퍼진 것은 기독 교가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빠르게 전파된 것처럼 당 시대의 조건들이 만들어낸 필연적 현상이었다.

민족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는 세계의 약소 민족들이 사회주 의에서 탈출구와 대안을 찾은 것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 카, 중남미 역사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우리나라 사회운동은 크게 보아 민족 주의적 실력양성운동과 사회주의적 대중운동으로 나눠진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운동 역시 최종 목표가 민족의 해방에 놓여져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항일운동사의 일부이다. 당연히 제주에서도 사회주의 청년 항일운동이 나타났다.

그 중심이 반역자구락부와 신인회였다. 이 단체를 이끌었던 인물은 송종현, 김택수, 한상호, 강평국, 홍양명 등이었다. 이 중 송종현은 서울에서 학생으로 생활하던 중 사회주의 청년운동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01년 1월 28일 제주도 신좌면 신촌리 2088번지(현재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서 출생했다. 1918년 4월 서울 휘문고 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재학 중, 이듬해 서울에서 일어난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에 휘문고보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이렇게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송종현은 1921년 제주출신 사 회주의자인 김명식 등이 이끌었던 사회주의 서울청년회의 활 동에 영향을 받고, 그해 제주에 내려와 김택수, 한상호, 강평국, 홍양명 등과 함께 제주 최초의 항일 청소년단체인 ‘반역자구락 부’를 창립한다. 이듬해 1922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송종현은 다시 제주로 귀향한다. 이때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김성숙이 가파도에 설립 한 민족교육기관인 신유의숙(명신 가파의숙)에서 김한정, 강문범, 장종식, 김호천 등과 합류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송종현은 학생들에게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을 이야기하 며 학생들이 잘못했을 때는 회초리를 들고 학생들을 때리지 않고 제 손바닥을 때리는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이들 교사 대부분이 항일 사회주의 청년들이었다. (이후 1932년 제주도공산당 재건운동에 연루되어 검거되고 대부분 옥고를 치른다) 신유의숙과 사회주의 청년교사들의 영향으로 1923년 9월 23일 항일을 내건 제주청년연합회가 가파청년회, 모슬포청년회 등을 주축으로 창립된다. 이 청년연합회가 1928년 4월 제주청 년동맹으로 결성되기에 이르렀고 1920~30년대 제주지역 항일 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다.

송종현 등은 이 시기 항일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기 관 설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취지하에 시작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해 ‘민립대학설립 기성회 제주지회’의 서기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송종현과 함께 신인회 등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한 강창보, 김택수, 한상호(왼쪽부터).
송종현과 함께 신인회 등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주도한 강창보, 김택수, 한상호(왼쪽부터).

3·1운동 6주년을 맞은 1925년 3월 11일, 송종현은 제주읍 일도리 자신의 집에서 ‘반역자구락부’ 항일 청소년 멤버들을 모아 ‘신인회’를 조직했는데 이때 송종현은 교양 간사를 맡았다. 이 신인회는 당시 제주도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송종현, 김택 수, 한상호, 홍순일, 강창보, 김정로, 오대진, 김시용 등이 모두 참여한 실질적인 제주도 항일운동의 중심적 비밀결사였다.

그때 송종현의 집은 일제 경찰의 감시대상에 올랐다. 그리고 일제 검경은 송종현을 비롯한 신인회 참여자 모두를 체포했다. 당시 동아일보 등 보도를 보면 5월 9일 일제의 검경은 신인회 의 강령 중 “무산자를 본위로 한 신사회의 건설을 기함”이란 조항이 불온하다 하여 신인회 참여자들을 구금했다.

이 강령의 초안을 작성한 송종현, 김택수는 출판법 위반혐의 로 금고 6개월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들은 무산자를 내세웠지만 참여자들의 면면을 보면 무산 자들이 아니라 제주도내 상당한 재산을 가졌던 유산계층과 지 식인들이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육지부 다른지역의 사회운동이 노동자 농민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데 비해, 제주도 항일운동은 유산 계층의 청년과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도민 대다수가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신인회가 선언했던 ‘신사회’라는 것도 일제와 친일세력을 허 물고 다수 민중을 위한 독립국가사회를 건설한다는 뜻이었다.

교도소에서 나온 송종현 등은 1927년 2월 당시 대표적인 항 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제주지회 창립에 나섰고, 송종현이 지회장으로 선임됐다. 신간회는 1927년 서울에서 전국의 좌우익 세력이 합작해 결 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다.  설립 목적이 조선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 조선의 독립이었다.  신인회 청년들은 1927년 송종현의 지도 아래 강력한 항일운 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한다. 그해 10월 송종현은 제주읍 건입리(제주시 건입동)에서 ‘제3 차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를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선임 됐다.

이듬해 1928년 8월 서울에서 조직된 김명식 등의 조선청년동 맹이 활동에 들어가자, 송종현은 제주에서 신인회 지도 아래 있 었던 제주청년연합회를 민중해방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제주청 년동맹으로 조직체를 변경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얼마 후인 1928년 8월 24일, 일제가 항일운동을 차단 코자 제4차 조선공산당원 검거에 나서면서 송종현은 한상호, 김택수, 강창보, 김정로, 윤석원 등과 함께 검거됐다.

1932년 12월 12일 미결수로 있던 송종현에게 일제 경성지법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했다.

당시 판결문은 송종현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다”고 선고하고 있다.

1934년 8월 송종현은 감옥에서 폐결핵을 심하게 앓다가 출옥했다. 

곧 일본으로 가서 오사카 친척집에 거주하며 2년여 동안 영어강사로 생활하며 폐결핵을 치료했다.

1936년 송종현은 서울로 돌아와 한 때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는데 폐결핵이 재발, 그만두고 목재상을 하다가 서 울 원효로에서 쌀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1948년 8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부남철 기자  bunc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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