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극장’의 기억
‘현대극장’의 기억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2.1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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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삼도2동 문화예술의 거리 인근.

옛 신성여고 터에서 향사당(鄕社堂)을 지나면 제주 최초의 극장이었던 현대극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1944년 문을 열었던 이 극장은 무성영화를 상영하고, 연극을 공연했던 제주문화의 산실이었다.

4·3사건을 전후한 해방정국에서는 정치적 집회가 열리는 정치 1번지였다. 6·25 때에는 전쟁에 나가는 젊은이들이 여기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이후 1970~1980년대엔 얼마나 많은 까까머리 학생들이 여기서 울고 웃었을까. 이 극장엔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기억이 얼룩져있다.

이 오래된 건물이 재작년 제주도가 실시한 안전진단에서 불합격판정을 받았다. 근대 문화유산 지정과 향후 공간 활용을 주장하는 제언이 있었지만 결국 철거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텅 빈 극장 터.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근대문화유산 정책의 우리 현주소를 보는 것만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 사이 우리 제주 사회에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1990년대 말 서울 을지로의 국도극장이 철거되면서, 우리 삶의 지난 현장들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서울시민들이 하나 돼 등록문화재 제도를 탄생시켰듯이, 우리도 현대극장을 기억하면서 제주의 근대문화유산을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조선 시대 건축물만이 아닌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지은 건축물들도 귀중한 문화의 자산이다. 서구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이전부터 근대문화유산을 중요하게 판단해 보존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우리가 꼭 서구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이런 정책의 시행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의 흐름에 근대건축은 문화의 연속성에 하나의 이야기의 역할로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함은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문화의 연속성이 중요하듯 근대 건축이 함유하고 있는 역사성 역시 중요하다.

 

역사는 지키려는 의지가 없으면 사멸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건축물과 유물, 유적을 지키려고 하는 최근의 흐름은 대단히 의미 있는 변화이다.

사회의 의식 변화에 맞춰 건축물과 유물, 유적들을 지키고 보존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제안들도 나오고 있다. 현대 생활과 역사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시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으나 1940년대 들어선 을지면옥·양미옥 등을 철거하지 않고, 인쇄업·가구·조명상가·문방구 등을 지키겠다고 했다. 재개발하면 모두 헐어버리는 과거와 비교할 때 대단히 의미 있는 반전이다.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공존할지 아직 지켜봐야겠지만 이런 시도가 정착할 때 우리 사회의 삶의 저변은 훨씬 두터워질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근대를 애써 모른 체하고 지내왔다. 수난의 시대였던 근대는 생각하기도 싫은 시기였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래서였을까? 영광의 시대의 찬란한 문화유산만을 우리의 유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에는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역사의 교훈을 담은 문화유산도 있고, 우리가 미처 몰랐던 소박한 문화유산도 있다.

 

철거된 현대극장에서 찾아낸 필름들과 영사기, 유물 등으로 미국인 사진가 키프 카니아씨가 작품화한 수집된 기억이 완성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앨범에는 오래된 이 극장의 입장권 관람권 등 추억의 사진들이 들어있다. 작가는 앨범의 빈 공간에 추억이 담긴 사진을 병치해 기억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수집된 기억들이 현대극장이 사라진 터에 남은 우리 마음속 기억의 상실감을 다 채워줄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이제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좋은지에 대해 과거와의 공존이 더 의미 있다고 여기는 시대를 맞았다. 낡고 퇴락했던 골목들도 이제 부활하고 있다. 그곳은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무엇에서 어떤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고향(故鄕)이다. 오늘 현대극장 터에는 까까머리 고등학생, 우리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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