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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진 ‘사회주의 독립운동사’ 복원을
묻혀진 ‘사회주의 독립운동사’ 복원을
  • 제주일보
  • 승인 2019.02.1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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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은 일제에 신음하던 이 땅의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충격을 받았다.

역사가 박은식은 10월 혁명을 세계 개조의 첫 신호탄으로 표현했다. 폭압과 좌절 속에 방황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적·계급적 평등을 내세우는 거대 제국의 등장은 큰 사변이자 복음이었다. 러시아가 일제 일본과 숙적 관계인 점도 희망의 근거였다. 1918년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청원하러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온 김규식은 19221월 모스크바를 찾았다. 그는 56명의 극동민족회의 참석 한국인들을 대표한 연설에서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중심지라고 선언한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3·1운동 전후 신생 소비에트공화국을 최후의 희망처이자 본보기로 여기기 시작했다. 일제의 토지 수탈 등에 따른 농촌의 비참한 현실과 갓 자라나기 시작한 노동자층의 존재도 사회주의운동 보급의 길을 넓혔다.

이 새로운 사상이 소비에트공화국에서 세계로 퍼지면서 청년과 지식인층,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때 싹튼 사회주의 계열은 1918년 연해주에서 결성된 최초의 본격적 사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시작으로 무장독립운동과 조직운동 등을 벌이며 독립운동의 큰 물줄기를 이뤘다.

민족 해방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던 제주지역 항일운동가들 역시 그랬다. 서울에서 3·1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목도한 제주 유학생들이 그들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노선은 1920~1930년대 제주 출신들에 의해 전개되는 다양한 민족해방운동의 모태가 됐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운동이 유일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했던 김성숙의 주도로 1921년 설립된 신유의숙’(가파도)도 대표적인 민족교육운동 기관이었다.

최근 정부가 이 시기 신좌소비조합 운동을 주도하면서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던 김시범 선생 등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등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있음은 다행이다. 그럼에도 송종현 선생 등 제주지역 사회주의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던 많은 선열들이 아직도 역사에 묻혀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사학)“3·1운동 전후 사회주의가 급속도로 퍼진 것은 기독교가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빠르게 전파된 것처럼 당대의 조건들이 만들어낸 필연적 현상이라며 해방을 추구하는 약소 민족들이 사회주의에서 탈출구와 대안을 찾은 것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역사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말한다.

제주지역의 사회주의 계열 항일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 묻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이다.

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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