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의 거리
부모와 자식의 거리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2.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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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 시인·다층 편집주간

마음먹고 심어도 피지 않을 수 있고, 무심코 꽂아 놓은 버들이 그늘을 이루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고전 중정증광석시현문(重訂增廣昔時賢文)’, 약칭 현문(賢文)’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부모의 욕심대로 자식들이 자라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얘기하는 경우에 종종 인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얼마 전 어느 드라마에서 한 배우의 대사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신()은 그들에게 자식을 보냈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어느 드라마에서도 그랬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최고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지만, 자식들의 꿈과 희망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자식들을 불행의 늪에 빠뜨리는 이야기에 공감했었다.

아무리 부모의 바람이 간절하다 해도,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다고 해도 자식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미래가 정상적일 리가 없다는 말이다.

셸 실버스타인의 유명한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마찬가지의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열매를 받고, 가지를 받고, 몸통을 받고, 마지막에는 쉴 수 있는 그루터기가 되어 준 나무에 소년은 어떤 존재였을까. 나무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나마 나무를 기르는 일은 자식을 기르는 일에 비해 덜 수고로울지도 모른다.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자식들을 위해 노심초사한 시간들을 자식들이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겨울 방학을 맞은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후배 한 명을 만났더니 하소연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학 좀 짧게 할 수 없느냐고, 방학이 너무 싫다고. 제발 눈 앞에 안 보이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는 후배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한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방학을 하고 집에서만 뒹굴거나 딴짓만 하는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해 봐야 쇠귀에 경 읽기니 부모로서는 빨리 방학을 마치고 개학 날만 기다린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학생과 상담을 할 적에 엄마가 잔소리를 할 때 귀담아듣느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은 저는 저희 거실 바닥의 무늬를 세밀하게 그릴 수 있어요이러는가 하면, “엄마가 잔소리할 때는 마음 속으로 애국가 불러요. 잔소리가 길어지면 4절까지 부르면 돼요하는 소리를 듣고, 부모들이 잔소리는 왜 하는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가까운 이웃에 아들 내외가 나이 드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구순(九旬)이 넘은 노모는 시도 때도 없이 칠순(七旬)의 아들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노파심이었으리라.

그런데 어느 날 그 할머니는 무슨 까닭인지 아들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저놈의 자식이 언제면 철들 거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나이 일흔이 넘어 철이 안 들었다고 하면 언제 철이 든다는 말인가. 아마도 부모와 자식의 거리가 그런 것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어쩌랴, 부모와 자식의 거리는 몇 광년(光年)이나 되는 것인지,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가능성은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부모의 가치관과 자식의 가치관의 상충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부모는 부모의 가치관에서만 자신의 의견을 세우고, 자식은 또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장을 주장하다 보면 둘 사이는 더 이상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마는 것이리라.

그러니 어릴 때 내 손으로 기저귀를 갈아주던 자식으로만 여기지 말고, 자식이 나이가 듦에 따라 자식에 대한 데이터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식도 부모에 대한 업데이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다.

작정하고 심었는데 왜 피어나지 않느냐고 타박하지 말 일이다.

아직도 방학이 꽤 남아 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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