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유리창의 기억
깨진 유리창의 기억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1.27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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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

하다 보니 어느새 옛말하는 나이가 돼버렸다. 최근 들어 옛날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옛날 일들을 떠들다 보면 끝 간 데가 없어서 우리가 언제 이렇게 되었나라는 말로 마무리되기 일쑤다. 아닌 게 아니라 스스로도 놀랄 만큼 옛날 일이 또렷해지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젊다고 우길 나이는 아닌 모양이다.

요즘 종종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금이 간 유리창에 붙어있던 창호지다.

지금에 비해 유리는 얇았었고, 예나 지금이나 조심성 없는 아이 말고도 유리창 깨지는 사건이 집집마다 있었고,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함부로 차서 교실 유리창에까지 가 닿게 하는 원기 왕성한 아이들이 있어서 어느 집이든 어느 교실이든 깨진 유리창이 하나 이상은 있었다.

와장창 깨진 것이야 새 유리로 바꿀 수밖에 방법이 없었지만, 금만 가거나 떨어진 조각이 커서 다시 끼워 맞출 수 있는 정도이면 금이 간 채로 그냥 두는 게 물자 귀하던 그 시절의 다반사였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대부분은 유리창에 난 금을 보이게 두지 않고 그 위에 창호지를 오려 붙였다. 깨진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게 금을 따라 직선으로 자른 창호지를 이리저리 붙이기도 했지만 꽃 모양, 달 모양, 별 모양같이 멋을 내어 오린 것을 붙여두기도 했다. 짐작건대 처음에는 깨진 금이 보기도 싫고 더러 다시 깨질 위험도 있어서 단순 접착제로 창호지를 붙이는 데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왕이면 예쁘게 장식하는 인간의 본능에 따라 다양한 문양으로 붙이기 시작한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 집 방문에도 창호지 문 아래로 난 유리창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금이 가자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창호지를 오려 붙였던 것이다. 큰 가위로 창호지 조각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별 모양, 꽃 모양을 네댓 개 만들어서 밥풀로 부치던 그 밤의 풍경이 또렷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창호지 조각을 오리면서 몇 개를 쓸 것인지를 계산했다. 간격이 너무 촘촘해서 값싸 보이거나 너무 벌어져서 헐거워 보이는 일이 없도록 깨진 금을 보면서 도안을 했다. 손재주가 특별나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저 남들이 하는 흉내만 내어 모양을 오려냈지만, 그 결과는 그야말로 어느 걸작에 못지않았다. 문양들을 가슴에 붙인 순간부터 유리창은 안과 밖을 구분 짓고 바람을 막아주고 빛의 반사를 조절하는 기능적인 물건이 아니라 동화의 세계가 수놓아진 마법의 망토로 변신했으니까.

이리저리 금이 간 유리창이 주는 가난의 흔적과 날카로운 상처의 예감 같은 것은 아이를 아슬아슬하고 언짢은 기분에 휩싸이게 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는 포근하고 안전한 망토의 한 자락을 덮고 잠이 들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조그만 창호지 문양들이 명예로운 훈장처럼, 없이 사는 신산스러움과 추레함을 잊게 해 준 것이다. 그렇게 유리창에 난 길고도 날카로운 상처는 덧나지 않게 치유됐고, 그래서 가난의 상처는 소박한 생활의 추억으로 마음 속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 창호지 문양을 가슴에 훈장처럼 붙인 유리창은 더 이상 보기 힘들다. 대부분은 깨진 유리창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물자가 넘쳐나는 시대, 깨진 유리창 한 장 정도 바꿔 끼우는 일이 그다지 버겁지 않게 된 덕분일 것이다. 창호지 몇 조각으로 가난의 추레함을 가리고 싶은 애틋함은 궁상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이 간 유리창을 쿨하게 내다 버리면서 함께 버린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기우고 꿰매고 때우면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되었을 것들도 그냥 버리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유리창에 붙여놓은 별 모양, 달 모양. 꽃 모양의 창호지 조각들이 상처도 소중하다고 말해준다고 한다면 역시 나는 어느새 나이 든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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