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받아쓰다, 삶을 기록하다
기억을 받아쓰다, 삶을 기록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1.20 1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선영 문화기획자·관광학 박사

새로운 해를 마주하니 지난 한 해 동안의 일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머릿속에 자리한다.

역대 최악의 폭염으로 기록되었던 2018년 여름, 연일 이어지던 폭염 경보에도 아랑곳없이 도내 해안가를 누비며 해신당과 불턱 등 108개소에 대한 현지 조사를 진행했었고 제주 지역축제 개선을 위한 방안 모색의 일환으로 도내 축제 현장 관계자들을 만나 현장의 어려움과 문제점, 반영되었으면 하는 정책에 대한 의견 수렴도 추진하면서 그 어느 해보다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분을 만났던 한 해였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었던 일은 제주시와 서귀포시 원도심에 거주하는 주민을 만나 그분들 삶에 대한 기억을 받아쓰고 기록하는 주민생애사 채록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주민 생애사 채록사업은 제주특별자치도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제주 도시재생 사업지 주민을 대상으로 생애사를 채록하는 사업이었다.

하나의 점에 불과할지 모를 평범한 개인의 생애사가 모여 선을 만들고 그 선들이 이룬 면이 바로 공동체의 기억, 공유의 기억이 될 수 있다는 논의의 공감에서 출발하였다.

결과적으로 총 열아홉 명 개개인에 대한 인생 궤적을 구술사 채록 방법을 통해 기록할 수 있었는데 각각의 나이가 적게는 63세부터 많게는 90세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아낸 삶의 이야기에 지금은 동북아 관광 허브를 지향하는 관광도시 제주의 근현대사가 관통한다.

산업화 시기 희망의 땅제주로 이주하여 꿈을 이루고자 동분서주, 고군분투했던 이야기, ‘밀항 열풍이 굉장히 불던’ 1970년대에 일본으로의 밀항을 시도했던 이야기, 제주지역 주민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탑동 공유수면 매립반대 운동을 펼쳐 삶의 터전인 바당밭을 지키기 위해 연좌 농성을 벌였던 이야기 등은 일제강점기, 제주4·3, 한국전쟁 등 굵직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시대를 목도하며 일상으로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들도 소중한 역사의 한 조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제주시 원도심의 한 자리에서 30년 이상 점포를 운영하거나 한평생 해녀라는 하나의 직업으로 살아온 구술자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낸 보통의 일상들이 곧 원도심의 역사가 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아직은 이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억을 받아쓰고 나누고 공감하는 작업이 대중적이지 않아 구술자 섭외나 구술자와의 라포(Rapport) 형성에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이 의미 있는 이유는 구술자가 이라는 수단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순간 구술자 자신이 삶을 돌아보게 되고 어려움에 맞서 살아낸 인생과 현재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삶 그 자체를 축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완전히 연결돼 있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점점 더 소외되고 관계는 해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요즘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편익과 편리가 충만한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든 깊은 속마음에서 거의 동일하게 결핍 상태라는 한 정신의학 전문가의 진단이 단순한 아이러니로 다가오지마는 않는다.

구술 채록 현장에서 흔히 마주쳤던 말들 중 하나가 떠오른다.

아이고, 늙은이들 이야기 들엉 무시거 허젠 게. 우리 아이덜도 안 듣는디(내 자식들도 듣지 않는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서 뭐 할려고).”

보통 사람들의 기억을 받아쓰고 삶을 기록하는 작업이 타인의 삶에 대해 듣는 것과 질문하는 것을 멈춘 오늘날의 우리의 삶에 작지만,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리라 기대해본다.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