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義를 위한 ‘타협’
正義를 위한 ‘타협’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9.01.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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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는 격언이 있다.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대표적인 명언으로, 너무 늦게 나온 판결은 정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법원이 4·3수형인 18명에게 내린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을 보면서 영국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이 남긴 이 말이 새삼 생각난다.

불법 구금과 폭행 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지 70. 이렇게라도 한을 씻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이 판결로 국가가 이들에게 금전 배상을 한들 과연 정의가 회복됐다고 할 수 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 최근 우리 사회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부정의인지 혼란스럽다. 김태우·신재민 사건의 경우만해도 한쪽에서는 정의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부정의라고 한다. 언젠가 이 사건도 법원의 판결을 받게 되겠지만.

 

사실 정의의 해석은 간단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에게 합당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무엇이 자기에게 합당한 몫인지에 대한 해석 논란을 남겼다. ‘정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지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이런 저런 정의론을 설파한 책도 많이 나왔다.

정의라는 말의 쓰임새도 철학자들의 해석만큼이나 다양하다.

미국은 정의(Justice)’를 법무부 명칭(Department Of Justice)으로 사용한다. 법치(法治)가 정의의 출발점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황당하게도 정의란 말을 정치인들이 즐겨 애용한다.

정치집단이 사용하는 정의는 정치적 지향점이나 의도를 포장 내지는 합리화하기 위해 동원되기 일쑤다. 정권에 따라 정의사회 구현에서부터 경제정의 실현까지 집권 명분이자 구호로 삼았다.

집권자들이 일단 정의의 깃발을 앞세우면 반대 의견은 설 자리가 없다. 이런 것이 과연 정의일까.

 

객관성은 신화일 뿐이라는 지금 이 시대에 정의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각기 처한 입장이 다르고 의견 또한 다르니까. 그러나 합리성에 근거한 개인의 이성적 판단은 간 데 없이 내편 네편을 갈라 집단의 주장만 내세우는 지금 이 세상의 정의는 끔찍하다. 흑백논리가 아닌 사고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늦은 정의 못지않게 너무 섣부른 정의 실현 요구도 큰 문제이다. 너무 늦은 정의가 정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듯, 너무 섣부른 정의도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나 법치주의가 내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큰 반면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조급하게 결실을 거두려고 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여기에 정치 권력의 간계가 개입하거나 군중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아 민의를 대신하게 하면 인민재판 같은 폭력적 세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새해 들어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말이 화제다. 이 노() 철학자는 정의의 본질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수학과 달리 사회과학은 하나의 물음에 다양한 해답이 나올 수밖에 없고, 정의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정의로 생각하는 것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조언이다.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는 정의는 타협의 산물이라 믿는 사람인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타협을 신뢰한다. 적에게 다른 한쪽 뺨마저 내밀어 부당한 처사를 받아들이는 쪽이 아니라 중간 지점 어디에선가 상대와 만나는 쪽이 옳은 방향이라고 믿는다.

4·3수형인들에 대해 검찰이 스스로 공소기각을 구형하고 법원이 공소기각 판결한 것은 다름 아니다.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이 없는 상황에서 검찰이 스스로 자뻑을 하고 법원이 그걸 시원하게 대여섯장 쌍피를 먹어서 이 사건이 났다는 것이다. 비록 늦었지만 정의를 위한 사법의 타협이다. 우리 정치도, 사회도 중간 지점 어디에서 만나는 타협이 필요하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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