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삶 옥죈 간첩 누명 벗었건만…”
“반세기 삶 옥죈 간첩 누명 벗었건만…”
  • 고경호 기자
  • 승인 2019.01.2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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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사건’ 김태주 할아버지 ‘무죄’ 선고 전 별세 안타까움
유가족들 “판결문 들고 묘소 찾아갈 것…이제라도 한 풀리길”

‘간첩’ 누명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20대 청년이 51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거운 한을 억지로 품으며 반세기를 살아온 그는 정작 무죄 판결을 앞두고 지난해 12월 30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지난 18일 제주지방법원 형사2단독 재판부(재판장 황미정 판사)는 1968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태주 할아버지(80)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김 할아버지는 일명 ‘만년필 간첩 사건’에 휘말려 징역을 살았다.

1938년 제주시 도련1동에서 태어난 김 할아버지는 1963년 군 전역 후 줄곧 농사에만 전념했다.

김태주 할아버지 수감 당시 모습
김태주 할아버지 수감 당시 모습

당시 ‘농사개량구락부’와 ‘제주시시범농’에서 회장을 맡을 정도로 농사밖에 모르던 그는 1967년 제주도로부터 ‘농업과수 연수생’으로 선발돼 선진 농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약 3개월간의 연수를 마친 그는 현지에 살고 있던 친척의 집에 일주일간 머물렀다.

단벌로 연수길에 올랐던 그는 친척에게 입던 양복 한 벌을 받았으며, 귀향길에 오르는 날 사촌 형제로부터 만년필 세 자루를 선물 받았다.

땀 냄새로 찌든 옷을 갈아입으라고 준 양복 한 벌과 4·3 당시 제주를 떠난 미안함 때문에 아껴 쓰던 만년필을 건넨 친척들의 애틋한 마음은 경찰과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반국가행위로 변질됐다.

김 할아버지가 생전에 작성한 자술서에 따르면 “만년필이 고장 나 수리소에 맡겼는데 만년필 내부에 ‘CHULLIMA’(천리마)와 ‘조선 청진’이라는 글자를 본 수리소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다”며 “경찰들이 조총련(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과 관련해 무슨 일을 한 것처럼 자꾸 꾸미려고 해서 계속 부인하다가 곡괭이 자루에 수십 대를 맞고 기절했다”고 증언했다.

‘천리마’는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에서 일어난 노력 동원 및 사상 개조 운동이다.

모진 고문과 허위 조사 끝에 김 할아버지는 ‘북괴가 소위 천리마운동의 성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제작한 선전용 만년필을 수수하고 조총련 지도원에게 양복을 수수한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당시 수사기관이 농사밖에 모르던 20대 청년을 간첩으로 만든 것이다.

김 할아버지의 장녀 김미경씨는 “석방 후에도 ‘간첩’이라는 붉은 딱지가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십수년간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했다”며 “아버지가 수감 중일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모친상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 괴로워했다”고 회상했다.

김 할아버지의 누명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해소됐다.

재심 선고공판에서 황 판사는 “피고인이 일본에 체류할 당시 친척에게 만년필과 중고 양복을 받은 이유만으로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았다는 점 등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그를 대신해 법정에 자리한 가족들은 판사의 “무죄”라는 말끝에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오열했다.

유족들은 “무죄 선고 직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선고가 확정되면 판결문을 들고 묘소에 찾아가겠다”며 “이제라도 한이 풀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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