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국, 도내 기금 출연 창설 공립약국과 계보 이어져
의국, 도내 기금 출연 창설 공립약국과 계보 이어져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1.1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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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의 의료기구와 그 운영(5)

약 제조·공급 등 운영…국립 약국 위축
윤계, 제주목사 부임  ‘삼읍회춘국’ 설치
이어 ‘의국’ 군현 기금·기부금으로 운영
‘증보탐라지’ 제3, 의약조, 의국의 설치경위와 운영 등 내용 수록 부분.
‘증보탐라지’ 제3, 의약조, 의국의 설치경위와 운영 등 내용 수록 부분.

조선시대 때 제주는 오늘날의 공립약국과 같은 의료기구도 설치·운영된 적이 있었다. 이는 애초 도내(島內)의 각 행정단위에서 기금을 출연(出捐)해 세웠던 것이다.

조선정부는 건국 초창기부터 군현제를 정비해 나아갔거니와 그 일환으로 각 지방의 의료기구도 설치·운영해 나아갔다. 이들 의료기구는 국립적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제주의 경우도 군현제의 일환으로 다종·다양의 의료기구가 들어섰다. 이들은 효종 4(1653) 편찬의 탐라지(耽羅志)’에 꽤 자세하게 나온 편이다. 이를 보자면 약국(藥局), 약한(藥漢), 약포(藥圃)도 나온다. 이들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은 기구였다. 곧 약포는 각종 약초를 재배하던 곳이고 약한은 진상 약재를 캐어 바치고 그 뒤에는 제주 관영(官營)에서 쓸 구급의 여럿 약을 캐는 일을 맡았다. 한편 약국이 자리한 좌위랑(左衛廊)에는 약 저장창고로 보이는 약고(藥庫)도 선조 34(1601) 이후에 들어섰다. 이 가운데 약국은 진상 약재의 심사와 조제를 맡는 한편, 제주 관영에서 쓸 구급약도 조제했다. 이로써 제주 사람도 질병이 들면 약을 공급받을 통로는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제주는 조선초기부터 약국, 곧 국립적 성격의 약 제조·공급처가 마련·운영됐으나 민간사회의 병자에게 약을 대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여느 지방사회도 약의 조달이 원활치 않았다. 이는 중앙정부가 병이 창궐한 군현으로 약을 보냈던 사실이 무수히 확인되고 있다는데서 알 수 있다. 제주의 경우도 중종 12(1517) 제주목사가 제주에 질병이 많음으로 당약재(唐藥材), 곧 중국 수입품의 약재 구하기를 원한다고 왕에게 보고했고 왕은 이를 들어줬음이 확인된다. 특히 제주는 전염성 열병이 숙종 40(1714) 창궐했다. 그 해 4월만 하더라도 1개월 안에 400여 명이 죽었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수백 첩에 달하는 상당히 많은 약을 제주로 보냈다. 이후 4개월여가 지나는 동안 전염성 열병이 더욱 창궐했던지 사망자가 5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중앙정부가 재차 상당히 많은 약을 다시 보낸 적도 있었다.

제주는 약의 조달과 관련해 조선전기부터 약국·약한·약포와 같은 국립 의료기구가 들어섬과 아울러, 중앙정부로부터 심약(審藥)이라 일컫는 의원도 파견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제주에서 질병이 들면 약을 구하기가 용이치 않았던 상황이 계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편 제주의 국립 의료기구는 그 기능이 점차 위축되어 나아갔던 것 같다. 약국의 경우는 헌종 7(1841) 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약한은 그 수가 효종 4(1653) 이전의 20명에서 영조 41(1765)에 와 15명으로 줄고, 헌종 7(1841) 무렵에는 불과 4명에 불과했다. 약포는 영조 41(1765)에 이미 그 존재가 없어진 상태였다. 또한 심약은 애초 독자의 근무처 공간 곧 심약방(審藥房)을 지녔으나 헌종 7(1841) 이전부터는 검률(檢律)과 함께 근무했다. 그 근무처의 공간도 검률당(檢律堂)이라 일컬었다.

17세기 후반 무렵에는 제주는 약이 전혀 없음으로 질병이 들면 손쓸 틈 없이 죽음만 기다린다고 할 정도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된 데는 국립 의료기구가 날로 위축되어 나아갔던 점도 작용했을 듯싶다. 그래서 공립적 성격의 약 공급처를 설치하려는 논의가 일어났거니와 그것이 삼읍회춘국(三邑回春局)과 의국(醫局)의 설치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이는 영조 41(1765) 편찬 윤시동(尹蓍東)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 자세히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윤계(尹堦)는 현종 13(1672) 제주목사로 부임한 뒤, 대정·정의현 수령과 함께 상의해 외부에서 당(()약재를 사오는 의료기구를 설치하고, 그 이름을 삼읍회춘국이라 지었다. 운영자금은 삼읍에서 매년 봄 미역 100묶음()과 가을 전복 2() 씩을 내고 마련했다. 이로써 당재와 향재를 계속 사들여왔다. 우선 이들 약재는 삼읍 수령과 그 휘하 관인과 더불어 관속(官屬)에게 제공됐다. 이 때는 일종의 외상판매와 외상구매였다. 그 증빙문건은 가물첩(價物帖)’이라 일컬어졌다. 민간인 경우는 질병이 들어 먹을 약을 원하면 가격을 계산해 받은 다음 약을 조제해 줬다. 영조 41(1765)부터는 삼읍의 미역과 전복을 받는 대신, 대정·정의현에서 나는 토산 약재만을 받았다. 또한 삼읍회춘국의 이름을 의국으로 바꿨거니와 18명의 소속 직군(直軍) 가운데 당번 직을 면한 직군은 약재를 사 바치도록 했다.

한편 영조 37(1761)부터는 평역고(平役庫)에게 약 사오는 일을 맡겼다. 그 자금도 평역고가 군역(軍役)과 관련해 수납받은 봉미(俸米)로 충당토록 했고, 그 양은 밑천 외에 여름과 가을을 아울러 내준 30석이었다.

제주의 의국은 현종 13(1672) 세워진 뒤 169년이 지난 헌종 7(1841)에도 계속 운영됐다. 이 과정에서 제주목사 심영석(沈英錫)이 순조 27(1827) 250냥의 돈을 운영자금으로 내놓아 보충했던 사실도 드러난다.

의국은 애초 도내 3개 군현의 기금 출연으로 설치되고 이후에도 그 운영자금은 계속적으로 도내 재원이나 혹은 제주목사의 기부금으로 충당한 의료기구였던 것이다. 여기서는 외부로부터 약을 사들여와 제주의 관인·관속집단과 함께 민간인에게 팔았다. 그럼에도 의국의 운영자금은 항상 딸렸던 것 같다. 이렇게 된 데는 의국이 국고지원을 받지 않았던 한편, 외상 판매로 돈을 많이 떼이고 판매 마진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의국은 군현제 일환으로 설치·운영됐던 국립적 성격의 약국과는 달리 제주목사 윤계가 도내 행정단위의 기금 출연으로 창설하고 이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줄곧 도내 기금 출연으로 운영된 공립 약국에 해당했던 것이다.

오늘로서 본 기획에 따른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물론 제주한의약사와 관련해서는 아직 못 다한 얘기가 많이 남아 있으나 여러 여건 상 일단 접을 작정이다. <>
 

•에필로그

풋귤·청귤의 분간논쟁과 못 다한 얘기들

풋귤과 청귤의 분간논쟁이 2016년 제주도의회에서도 감귤 미숙과의 이용을 둘러싸고서 일어났다. 사실 이 논쟁은 1000년에 걸쳐 내려온 것이기도 하다. 그 출발은 중국에서였다. 한편 오늘로서 본 기획의 얘기는 끝내고자 한다.

중국의 린다오런(藺道人)9세기에 청피를 임상에 썼다. 이후 청피는 어떤 귤나무의 열매껍질을 사용하느냐가 중요하게 됐다. 11세기 쑤송(蘇頌)청귤과 황귤은 같은 부류가 아니니 곧 서로 다른 한 가지 품종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더욱 논란이 커져갔다. 13세기 왕하오꾸(王好古)탕액본초(湯液本草)’에서 청피는(중략) 진피와 한 종류이다. 청피는 작으면서 풋귤이다. 익으면서 큰 걸 귤이라 한다.(중략) 또 진피와 청피는 두 종류라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논쟁이 되는 두 가지 설도 다 소개해 놓았다. 16세기 리찬(- {)청피는(중략) 귤피와 한 종류이다.(중략) 작으면서 색이 푸르고 미성숙한 걸 청피라 한다고 했다. 그는 청피가 풋귤임을 규정했던 것이다. 16세기 후반 리스쩐(李時珍)쑤송은 청귤이 미숙과란 걸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쑤송의 학설이 오류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청귤이 미숙과로서 인식·고착화되기에 이른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 때 청피가 제주청귤로 만들어져 향약집성방에 첨 기재되고 사용돼 나아갔다. 최근에도 일부이기는 하나 청피는 미숙과가 아니고 제주 자생의 청귤껍질로만 만드는 경우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편이다. 그동안 제주 동정귤, 귤피, 진피, 청귤, 청피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지난해의 기획부터는 애초 귤껍질 이용의 다양한 한의약식품을 유형별로 다룰 작정이었으나 그렇지 못 했다. 이는 최근 푸른색 귤 모양의 열매가 인기가 높은지라 청귤을 얘기하다보니 어느 새 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년간에 걸친 본 기획에 힘입어 얻은 성과는 자못 크다고 본다.

우선 광령리에 있는 동정귤의 유전자 조사가 이뤄졌다. 다음은 1000년에 걸친 풋귤·청귤의 분간논란에 마침표를 찍고, 청귤의 형질을 확인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이어 명맥이 끊어졌던 황감제도 되돌아보게 됐거니와 풋귤 이용의 가능성 제고에 기여했음도 빼놓을 수 없다. 더 나아가 한의약식품의 품질인증제도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됨과 함께 한의약산업의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다는 사실도 들 수 있다. 또한 제주만의 독특한 제주한의약사를 발굴하고, 그것이 체계적으로 정리될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가운데 해결해야 할 문제도 적지 않다.

먼저 현재도 풋귤이 청귤로 판매되고 있는 실정을 들 수 있다. 더욱이 청귤이 풋귤뿐 아니라 외래 산물인 깔라만시 등과 섞여서 얘기되곤 한다. 어쩌면 천년논쟁이 다시 확산·재연되는 끝없는 근심거리가 나타나고 있다고나 할까. 다음은 예전부터 제주에서 나는 모든 감귤류의 용어와 명칭을 바로 잡는 일도 시급하다. 예를 들면 산물(産物), 산물(酸物), 산물’, ‘산물, 산귤(山橘)’, ‘산물, 진귤’, ‘산물껍질, 진피(陳皮)’, ‘진피(陳皮), 진피(眞皮)’, ‘진귤, 진귤(眞橘), 진귤(陳橘)’, ‘동정귤(洞庭橘), ‘동진귤’, ‘탱자, 지각(枳殼), 지실(枳實), 구귤(枸橘)’, ‘지각, 지실’, ‘왜귤(倭橘), 지각’, ‘당유자(唐柚子), 소유자(小柚子)’, ‘유감자(乳柑子), 온주귤(溫州橘)’, ‘등자피(橙子皮), 유피(柚皮)’ 등과 같이 이름의 오용·혼용화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역사적 검증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하나 시간 상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직도 이름의 정명화가 안되는 산귤(고정군 제공)
아직도 이름의 정명화가 안되는 산귤.(고정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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