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9.01.1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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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어어, 내가 왜 이러지싶어질 때가 있다. 눈이 침침하고 눈물이 잦다 싶으면 TV 자막 글씨가 또렷하지 않고 신문과 책 읽기도 전 같지 않다. 처음엔 눈병이 났나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노안(老眼)이 다가온 데 따른 현상이다.

노안은 겉으로 봐선 표시나지 않는 데다 처음에만 당황스럽지, 곧 받아들이게 되고 안경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이 60이 됐다고 흰 머리 휘날리는 건 옛날 얘기다. 환갑이면 얼추 천수(天壽)를 다 누렸다고도 여겼던 것은 구석기 시절이다. 지금은 환갑이면 청춘이고 칠순에도 백발(白髮)은 드물다

백발이 연륜과 경험의 표상으로 여겨진다는 말도 있지만 기왕이면 하얗게 센 머리보다 젊어 보이는 검은 머리를 원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하물며 백발이 늙고 낡음의 대명사로 치부됨에랴. 너도 나도 염색을 하는 건 그런 때문이다.

 

엊그제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의 출두 장면이 국민의 눈길을 끌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어보이고 얼굴이 초췌한 것이야 그럴 수 있지만 거의 백발이 다 된 머리칼이 더욱 더 새하얗게 다가왔다.

대한민국은 입법, 사법, 행정 삼권 분립체제다. 전 대통령이, 전 국회의장이 검찰에 소환되는 건 여러 번 보아왔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 대법원장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기자들의 포토라인에 선 것은 사법부 71년 사상 처음이다.

사법부의 수장이었던 본인의 심정이야 물어보나 마나일 것이다.

참담, 송구, 부덕의 소치라는 그의 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세상사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다. 사건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이번 사태가 사법부 역사에 오점으로 남지 않을까 걱정된다.

 

삼천 장이나 되는 흰 머리/ 온갖 시름으로 올올이 길어졌네/ 알 수 없어라 거울 속 저 모습/ 어디서 늦가을 무서리 맞았는지(白髮三千丈 緣愁似箇長 不知明鏡裏 何處得秋霜).’

이백(李白)추포가(秋浦歌)’. 만년에 귀양에서 풀려난 그가 추포에 와서 거울을 보고 너무 늙어버린 자기 모습에 놀라 지은 시다. 이 시에서 그는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이라는 과장법을 썼다. 근심으로 허옇게 센 머리카락 길이가 3000(10)이나 된다고 했으니 허풍이 좀 센 편이지만, 이는 머리털보다도 끝없는 고뇌와 슬픔의 길이를 은유한 것이리라.

백발은 모발의 멜라닌 부족으로 생긴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나 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뜻하기도 한다.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주흥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자문(千字文)을 다 짓고 머리가 하얗게 돼버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같은 글자가 겹치지 않게 4자씩 짝을 지은 250()를 하룻밤 새 완성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 혁명기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에 섰을 때 머리가 온통 백발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법원의 상징물은 정의의 여신상이다. 이 정의의 여신은 양손에 저울과 칼을 쥐고 있다. 두 눈은 안대로 가려서 앞을 보이지 않게 했다. 저울은 공평, 칼은 정의, 안대는 공정을 상징한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면서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조각상은 서양 대부분의 법원 앞에 서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도 이와 비슷한 게 있다. 서양의 것과 다른 점은 한복 차림에 칼 대신 법전을 들고 눈은 뜬 채앉아 있다는 점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두 도중에 이런 눈 뜬대법원 앞에서 짧은 소회를 밝혀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았다. 서양 것이든 한국 것이든, 눈을 가리든 않든, 칼이 있든 없든 법원은 공평무사한 법정신을 실현해야 한다.

같은 날. 최완주 서울고등법원장이 파주시 법원 판사로 자리를 옮긴다고 했다. 지난해 9월 박보영 전 대법관이 여수시 법원 판사를 지원해 옮긴 것처럼 시골 판사로 내려가 살겠다는 것이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스스로 물어보게 하는 1월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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