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목사 기건, 제주 첫 공립의료기구 ‘구질막’ 설치
제주목사 기건, 제주 첫 공립의료기구 ‘구질막’ 설치
  • 뉴제주일보
  • 승인 2019.01.0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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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주의 의료기구와 그 운영(4)

조선시대 제주 전역서 ‘한센병’ 유행
환자 수용구호사업으로 ‘구질막’ 운영
의생·승려 파견…의복·식량·약물 보급
‘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4월 2일조, 기건의 구질막 설치 동기와 그 명칭 출현 및 운영실태 등 관련 부분.
‘문종실록’ 권7, 문종 1년 4월 2일조, 기건의 구질막 설치 동기와 그 명칭 출현 및 운영실태 등 관련 부분.

조선시대 때 제주는 공립적 성격의 의료기구도 설치·운영됐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구질막(救疾幕)이었다. 이는 제주목사 기건(奇虔)이 세운 것으로 오늘 날의 환자 수용구호시설과 같았다.

고려·조선시대 때 수령의 성품과 행적은 민생의 편안함과 괴로움에 직결됐다. 수령이 선정(善政)을 펼쳤을 경우에는 주민이 두고두고 칭송·흠모했던 반면에 가렴주구 등의 악정을 행했을 때는 분노했고 심지어는 민란도 일으켰다. 중앙정부도 사신을 파견해 수령의 부정행위 여부 등을 감찰했으며 혹 민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진압·위무하는 한편, 수령을 처벌·파직해 주민의 분노와 억울함을 진정시켰다. 제주 지역도 행정단위의 변화에 따라 각종 수령이 파견됐다. 이들의 성품과 행적도 제주 사람의 민생과 그에 따른 희비를 좌지우지했다. 이들 제주의 수령 가운데 현재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정관이 제주목사 기건이다.

제주목사 기건하면 전복과 관련해 선정을 펼쳤던 목민관(牧民官)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종 25(1443) 제주목사로 부임해 와 세종 27(1445) 이임하기까지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제주사람의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기건이 전복을 먹지 않게 된 것은 전복을 캐다가 번번이 사람이 희생되는 등의 제주 실정을 직접 목격했던 점이 크게 작용한 듯싶다. 그는 제주목사로 오기 전 연안군수(현 황해도 연안군 연백읍)를 지낸 적도 있었다. 이때도 주민이 붕어 공물(貢物)에 바칠 붕어잡이에 힘들어 하자 부임 3년 동안 붕어를 한 번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기건의 경우는 자신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지역의 주민이 바로 눈 앞에서 고달파하는 것을 못 참는 성정(性情)을 지녔던 것 같다.

오늘날에 와 기건은 전복 관련 선정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편이나 그보다 더욱 주목돼야 할 선정은 구질막의 설치라 하겠다. 구질막은 기건이 제주의 한센병 환자를 수용구호코자 세운 의료기구였다.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2월 29일, 기건의 선정 드러나는 졸기(卒記) 부분.
'세조실록' 22권, 세조 6년 12월 29일, 기건의 선정 드러나는 졸기(卒記) 부분.

한센병은 인류 역사 상 가장 오래된 질병 가운데 하나로서 과거 나병(癩病)이라고 불렸으며, 현재도 제3종 법정전염병에 해당한다. 주로 피부에 나타나는 침윤(浸潤돌출의 작은 병변·붉은 빛깔의 얼룩점·결절(結節)의 멍울류 등과 지각마비(知覺痲痺)를 가져오는 만성 감염병이다. 한센병이란 명칭은 1873년 노르웨이의 한센이 나환자의 멍울류 조직에서 나균을 처음 발견함으로써 유래했다. 한의학에서는 나질(癩疾대풍나(大風癩대풍질(大風疾대풍창(大風瘡)이라고 일컫는다. 이밖에도 옛적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일부 학술적 분야에서는 나병으로 하되 사회적 분야에서는 한센병으로 통칭한다.

한센병은 오늘날에도 전파경위가 명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조기발견해 치료한다면 충분히 완치할 수 있다. 전염력도 약하며 그나마 없앨 수도 있다. 그래서 한센병 환자는 1916년에 소록도자혜의원이라는 명칭으로 개원한 특수병원에 강제격리수용된 적도 있었으나 현재는 자진 입·퇴원이 가능하다.

하여간 한센병은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난치의 질병이었거니와 전염력도 강했던 것으로 인식됐던 만큼 천형병으로 간주됐다. 그 전염력에 대해서는 광해군 4(1612) 사간원(司諫院)이 왕에게 아뢰기를 대풍창(大風瘡)은 천하에 고약한 병입니다. 경상좌도 사람 가운데 이 증세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근래에는 각 고을 사람들에게 계속 전염되고 있습니다. 혹 물에 들어가 풍창(風瘡)을 씻거나 또는 집에서 가려워 긁기도 하는데 그 부스럼 딱지를 먹은 물고기와 닭을 사람이 먹었을 경우 그 병을 앓게 됩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가족 구성원 중 한센병 환자가 있으면 비록 부모처자 사이라도 전염을 두려워한 나머지 살해하거나 혹은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뒤이어 그것이 발각되어 강상죄(綱常罪)로 참형을 당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기건의 경우도 제주목사로 부임한 뒤 제주의 삼읍(三邑)에 걸쳐 한센병이 유행하고, 이들 환자가 방치된 뒤 목숨을 끊는 것을 목격하자 한센병 환자 수용구호사업을 벌이게 됐던 것이다. 이 사업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기건은 승려로 하여금 바닷가 벼랑에서 자살한 한센병 환자의 시신을 수습해 묻게 했다. 다음에는 제주목·정의현·대정현에 각각 수용구호시설, 3곳의 구질막을 설치하고, 여기에 69명의 환자를 수용한 뒤 이들에게 의복과 식량 및 약물을 보급했다. 이때의 약물은 고삼원(苦蔘元)이었다. 이는 제주어로 너삼 등이라 일컫는 콩과식물로서 피부병 치료제로 쓴다. ‘동의보감에도 고삼이란 약초가 대풍창, 곧 한센병의 각종 약재에 주성분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나온다. 한편 구질막에는 바닷물로 목욕하는 기구도 갖췄다. 또한 의생(醫生)과 승려를 파견한 뒤 이들로 하여금 구질막 수용환자의 구호를 맡아 주관케 했다. 이로써 한센병 환자 69명 가운데 45인은 나았고, 10인은 계속 치료가 이뤄지게 됐다. 다만, 14인은 종내 죽고 말았다.

구질막 수용 환자 가운데 치병율이 2년여 만에 65% 정도를 넘나들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이는 완치자들이 제주목사 기건의 이임 때 서로 더불어 울면서 보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기건은 구질막의 계속적이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세 고을의 승려 가운데 각각 한 사람을 군역(軍役)을 면해 의생과 더불어 구호에 종사케 하거니와 의생도 관직을 내려줘 장려할 것을 왕에게 청했으며 승인받았다. 그럼에도 제주의 구질막은 기건의 제주목사 이임과 함께 그 활동이 점차적으로 위축되어 나아간 끝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던 것 같다.

제주의 구질막은 한센병 수용구호시설의 효시라 하겠다. 특히 구질막은 우리나라의 여느 군현에는 없었고 제주목사 기건이 독자적으로 설치·운영한 의료기구였다. 구질막은 군현제 일환으로 설치·운영됐던 국립적 성격의 의료기구와는 달리 공립의료기구에 해당했던 것이다.

  

•고려·조선시대 제주 청귤나무

기록에 나오는 제주 청귤의 형질

제주 청귤은 어떤 귤이었을까. 이를 사서를 통해 알아보자.

청귤은 고려시대 1234년 이규보의 한시(漢詩)에 처음 나온다. 그 내용은 은근한 정 머금은 청귤, 바다를 건너 왔으니,(중략) 2월 제주를 떠나, 이제 비로소 도착했는데도, 사랑스럽구나! 그윽한 향기 아직도 감도네이다. 이로써 청귤이 제주에서 나고 음력 2월이면 먹을 만했음도 드러난다.

조선시대 와서는 청귤이 각종 사서에 나온다. 이를 연대순으로 보자면, 1520년 김정은 청귤은 가을·겨울에는 매우 시어서 먹을 수 없으나, 겨울지나 음력 2~3월에 이르면 시고 단 맛이 적당하고 음력 5~6월 되면 묵은 열매는 노랗게 푹 익고 새 열매는 푸르스름해 고운데 묵은 귤과 새 귤이 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 꽤 볼만하다. 이때는 맛이 달아 마치 꿀을 식초에 버무린 것 같다. 음력 7월에 와 열매 속의 씨는 모두 녹아 물이 되지만 맛은 오히려 달다. 음력 8~9월을 지나 겨울에 이르면 열매는 또 다시 푸르스름해지고 씨가 다시 맺히고 맛은 매우 시다고 했다. 1578년 임제는 청귤의 껍질이 당유자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봤다. 1732년 정운경은 청귤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뀔 때 노래지기 시작한다.(중략) 꼭지가 단단해 낙과하지 않고, 음력 4월 꽃이 피고 음력 5월 열매가 맺는다. 예전 열매는 노란 빛이 차츰 사그라지면서 도로 푸르러지고 맛도 점차 시고 매워지기 시작한다. 겨울이 되면 햇귤과 예전 귤을 판별키 어렵다. 한 개의 꼭지가 몇 년을 지나는 동안 색깔과 맛이 수시로 변한다고 했다. 1811년 조정철은 음력 3~4월에 이르면 충분히 익는데 먹을 수 있다고 했거니와, 1843년 이원조는 크기가 산귤(山橘)만 하다고 봤다. 현재도 청귤나무가 서귀포시 상효동과 감귤연구소에 자라고 있다. 이들의 형질과 앞서의 서지학적 내용을 참작하자면, 제주 전통의 청귤나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을 듯싶다.

청귤은 수세(樹勢)가 좋고 꼭지가 몇 년을 지탱할 만큼 추위와 병에 강하다. 음력 4·5월 각각 꽃 피고 열매 맺지만 다른 감귤과는 달리 꽃이 핀 이듬해 음력 1월까지 껍질이 푸르며 음력 2월이 돼야 약간 노래지기 시작한다. 열매가 음력 3~4월에 충분히 익고 이를 따지 않으면 음력 5~6월쯤에는 노란귤과 다시 새로 생긴 열매와 같이 있게 된다. 음력 7월이 되면 예전 열매는 씨가 모두 녹아 없어지고 맛이 더욱 달게 된다. 음력 8월이 되면 예전 노란 열매는 또 다시 파래지기 시작하고 겨울에 이르면 씨가 생기고 맛은 매우 시어서 새로 열린 열매와 다름이 없다. 껍질은 굴곡이 심하고 두꺼우며 뭉그러져 있어 당유자 껍질과 비슷하다. 열매 크기는 보통 감귤보다 작다.

이들 형질의 제주 청귤이 1950타나카(田中)’에 의해 ‘Citrus nippokoreana Tanaka’란 학명도 부여받기에 이른다. 한편 청귤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재배돼 왔었거니와, 이는 각각 고뢰입화귤(高雷立花橘)과 코우라이타치바나(koraitachibana)라 한다. 제주 청귤이 오늘날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편이나, 사서의 기록도 참작해 충분히 대량생산해 낼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요새 푸른색 감귤 모양의 열매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 만큼 제주 청귤나무의 대량재배도 시도해봄직 하다고 하겠다.

지난해 12월 하순 제주 청귤나무. 감귤연구소 제공
지난해 12월 하순 제주 청귤나무. 감귤연구소 제공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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