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배우다
고향을 배우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12.2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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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어른들은 마을 이름을 평대라고 부르지 않고 벵듸라고 불렀다. 제주어 사전에는 벵듸를 널따란 벌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낳고 자라기만 했지 마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오후에는 비 날씨가 예보되었지만 아직은 야외활동이 가능할 것 같아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친구는 친환경 당근 농사와 하우스 깻잎 재배를 하는 터라 늘 바쁘다. 그런 시간을 쪼개어 외부인들에게 평대마을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관광지로 잘 알려진 비자림을 빼면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조그만 마을이다. 무슨 자랑거리며 알릴만한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싶은데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순간 금세 나의 기우임을 깨닫게 한다.

인터넷 블로그에서 석희 삼촌으로 불리는 친구는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을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말한다. 마을길을 다니며 곳곳에 얽힌 사연과 전설을 이야기 하는데 처음으로 알게 되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도 시기를 한 무리에 의해 바다에 수장이 된 부대각 전설을 이야기할 때에는 더욱 열띤 목소리다. 지금 시대의 정치 현실과 다르지 않은 대목에 가서는 울분 섞인 목소리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명강사가 따로 없다.

마을에서 경관이 좋은 자리에 한 개씩은 있다는 비석의 유래도 특이하다. 4·36·25를 겪어오면서 남성의 비율이 아주 부족했던 시절 일이다. 환갑을 넘긴 기념으로 이름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백세시대라 하는데 그 옛날 얼마나 목숨 지탱하기가 힘들었으면 살아있는 기념으로 친구들이 모여서 이름을 새겨 놓았을까? 지난한 세월의 자취에 발길을 머물게 한다.

걷는 내내 동네 삼촌을 만나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당근 작황도 물어보고 건강도 챙겨 묻는다. 친구는 이웃 삼촌들의 생활과 자식들의 근황까지 파악하고 있다. 낳고 자라기만 했지 동네 사정을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자식처럼 살갑게 대하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동네 삼촌들과 유대관계를 통해 그분들의 지혜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려 애쓰는 친구의 마음이 오롯이 와 닿는다. 친구의 시골살이가 대견하고 우러러보인다.

육지에서 사업허당 망해 들어 온 아이들이 다 잘돼여그네 큰소리치며 사는 동네가 우리 동네여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래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평대리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어 든든하다. 후손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은 마을길을 걷다 보니 기억 저편에 저장되어 있던 유년의 일들이 떠오른다.

한라의 정기 뻗어 내린 이 땅에어느새 초등학교 교가를 끄집어내어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불림모살길, 수리왓길, 도깨동산, 오소록길, 넓적빌레, 갯동산, 반여동산, 고냉이물, 감수굴, 대수굴.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마을길을 따라 걷는데 돌담에서 담쟁이 단풍이 햇살에 일렁이며 반긴다. 옛 정서를 잃지 않고 더불어 사는 내 고향을 위해 나도 할 일이 있을 텐데.

오랜만에 고향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내어 준 숙제를 풀 듯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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