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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제주다움’ 가치 발굴해 낸 ‘제주학 선구자’
70년 전 ‘제주다움’ 가치 발굴해 낸 ‘제주학 선구자’
  • 부남철 기자
  • 승인 2018.12.19 1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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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故) 석주명 선생
조선 나비 255종 정립한 ‘나비 박사’
1936년 채집 위해 찾은 제주와 인연
2년간 제주 자연·인문 등 중점 연구
방언·인구·문헌 등 ‘제주도총서’ 펴내
도, 2020년 완공 목표로 기념관 추진
학술적 가치 재조명도 본격화 주목
고(故) 석주명 선생 생전 모습.
고(故) 석주명 선생 생전 모습.

현재 제주는 ‘유네스코 3관왕’에 오르면서 환경과 문화에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전 세계인들은 이런 제주의 환경과 제주인의 삶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70년 전 이런 제주의 가치를 깨닫고 세상에 제주를 알렸던 ‘제주학의 선구자’ 가 있다. 우리에게는 ‘나비 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선생(1908~1950). 제주인보다 더 제주를 사랑했고 제주인보다 더 제주를 이해한 ‘통섭(統攝, consilience)의 학자’ 석주명 선생을 통해 ‘제주다움’ ‘의 미래가치를 고민해 본다.

 

자타 공인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은 19081017일 평양에서 태어나 625 전쟁 중인 1950106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42년이라는 짧은 삶 속에서 우리나라 나비와 제주도(濟州島) 연구에 몰입하고 국제어인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썼다. ‘나비 박사의 시작은 일본 유학에서 결정됐다. 1926년 송도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 농학과에서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 교수의 지도로 나비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귀국 후 1931년 모교인 송도고보 교사로 재직해 11년 동안 박물교사를 맡았다. 이 때가 바야흐로 그의 나비연구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전공과 관계있는 일을 하기로 하였으나 시력에 자신이 없으니 곤충을 택해야 했고, 곤충이라면 누구나 밟는 첫 단계인 나비를 채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석주명 선생은 나비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샘플을 분석해 논문을 작성한 학자였다. 1936년 대표적인 논문 배추흰나비의 변이연구에서 그는 16만 개가 넘는 나비를 하나하나 분석했다. 이를 통해 조선 나비가 921종에 달한다는 외국 학자의 기존 연구 오류를 바로잡고 조선 나비를 255종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집대성해 1939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 지부의 의뢰를 받아 영문 저작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발간했다. 이 책은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됐고 그는 세계에 30여 명 밖에 안되는 세계나비학회 회원이 됐다.

 

제주, 나비박사를 유혹하다

석주명 선생은 나비 채집을 위해 1936년 제주를 찾았고 제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가 한반도와 같은 점도 있지만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제주도 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우리 문화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의 문화는 우리문화의 뿌리를 찾고, 궁극적으로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해준다고 보았다.

석주명 선생은 적어도 제주도를 세 차례 방문하거나 체류했다. 첫 번째는 1936년 나비 채집을 위해서이고 두 번째는 1943424일부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소속인 개성의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이 개장하면서 부임해 2년 동안 근무했다.

첫 번째 방문에서 제주의 자연과 문화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그는 1943년 제주에 장기간 체류하게 되면서 나비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자연과 인문사회 분야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을 넓혔다. 그는 당초 1년 계획이었던 체류 기간을 연장하면서 곤충채집부터 방언, 인구, 제주도 관련 문헌과 자료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읽은 것 중에 제주도에 관한 것이 나오면 즉시 적당한 제목을 붙여 카드에 기록해 쌓아두었다.

그가 제주도에 오기 전까지 그의 연구 대부분은 나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에 머물게 되면서 그의 학문적 연구는 인문사회분야까지 확대된다. 그는 제주에서 곤충학자를 넘어서 자연, 인문,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이른 바 통섭의 학자가 됐다.

고(故) 석주명 선생이 채집한  나비.
고(故) 석주명 선생이 채집한 나비.

제주학의 기틀을 남기다

석주명 선생은 19455월 제주를 떠나고 그 후 2년 동안 제주도관련 자료들을 분석하고 정리해 제주도총서(6)’를 기획하고 발간한다.

그는 스스로 제주다움과 제주적인 것을 지키기 위해 인문사회학적 연구를 직접 수행했으며 제주도총서를 남겼고 제주학의 선구자가 됐다.

제주도총서는 총 6권이며 제주도방언집(1947)’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제주도 인구론(1949)’ ‘제주도문헌집(1949)’은 석주명 선생 생전에 출간됐다.

제주도수필(1968)’ ‘제주도곤충상(1970)’ ‘제주도자료집(1971)’625 전쟁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완간되지 못 하고 유고로 남았다가 여동생 석주선 박사(1911~1996)의 노력으로 1971년 완간됐다. 특히 제주도방언집은 우리나라 사람이 펴낸 최초의 방언집으로 국어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제주다움의 가치는

석주명 선생은 19482월 현 제주일보의 전신인 濟州新報(제주신보)’ 에 기고한 조선의 자태-제주에서(194826일자)’에서 이도 후 4년 만에 다시 와보니 해방과 38선 관계로 육지인들의 입도와 육지문화의 침윤으로 제주도의 특이성이 없어져 저감을 느낀다라며 제주다움과 제주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또 濟州新報(제주신보)’ 에 기고한 제주도청론(19481020일자)’에서 자신이 제주를 누구보다 잘 아는 () 제주인이라고 밝히면서 미군정하에서의 제주도(濟州島)의 도() 승격은 왜곡된 행정현상이라고 비판하고 중앙청 직속의 특별도청이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제주도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지하수 개발에 착안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지하수 문제가 해결되면 제주도개발 문제는 반은 성공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폈다.

70년 전 제주인보다도 제주의 가치를 이해하고 제주다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설파했던 석주명 선생에 대한 조명은 이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지난 10제주학회는 제48차 전국학술대회에서 석주명 탄생 110주년 기념, 석주명의 삶과 학문세계를 주제로 석주명 선생에 대한 재조명에 나섰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석주명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지역과 세계, 특수와 보편, 전통과 현대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조화시키려 했던 제주학의 선구자석주명 선생이 추구했던 제주다움의 가치를 이어가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남겨졌다.

서귀포시 영천동에 있는 옛 경성제국대학 제주도시험장 연구소 건물.
서귀포시 영천동에 있는 옛 경성제국대학 제주도시험장 연구소 건물.

 

 

부남철 기자  bunc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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