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현대사에 커다란 획 그은 ‘미래를 걸었던 거인’
제주 근현대사에 커다란 획 그은 ‘미래를 걸었던 거인’
  • 고경호 기자
  • 승인 2018.12.17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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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17. 우인 고수선 선생
‘제주 여성 의사 1호’ 우인(又忍) 고수선 선생은 한 세기 앞서 미래를 향해 걸으며 제주 근현대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거인’이다. 사진은 1970년대 후반 그의 아들인 김률근씨가 운주당에서 촬영한 고 선생의 생전 모습
‘제주 여성 의사 1호’ 우인(又忍) 고수선 선생은 한 세기 앞서 미래를 향해 걸으며 제주 근현대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거인’이다. 사진은 1970년대 후반 그의 아들인 김률근씨가 운주당에서 촬영한 고 선생의 생전 모습

부지런히 바른 길을 걸었다. 나라를 잃자 독립을 외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세웠다. 전쟁고아가 생겨나자 보육원을 설립하고, 여성 권익을 위해 선거에 출마했다. 그렇게 그는 제주 여성 독립유공자 서훈 1호, 제주 여의사 1호, 제주 여성 정치인 1호 등 ‘역사’가 됐다. 여성으로 살기 힘든 시대를 살아왔지만 여성이라고 주저하지 않았다. 한 세기 앞서 미래를 향해 걸었던 우인(又忍) 고수선 선생은 제주 근현대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거인’이다.
 
■ 본능처럼 안고 자란 일본에 대한 반감

고수선 선생은 1898년 5월 4일 가파도에서 태어났다.

당시 가파도는 무단으로 해산물을 채취해가는 일본 어선들과 잦은 충돌을 벌이면서도 개화의 통로로써 선진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고 선생은 8살이 되던 1905년 부모님과 함께 당시 대정현 우면 하모리로 이사했다.

이때에도 일본 어선들이 일정 금액만 지불하면 모슬포 연안에서 조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정 주민들과 일본 어민들 간의 충돌이 비일비재했다.

지난 12일 출간된 「미래를 걸었던 거인 운주당 할망 又忍(우인) 고수선 傳(전)」(이하 고수선 평전)에는 “고수선이 어른들에게 가파도와 모슬포를 오가며 행패를 부린 일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 리 없다…일본에 대한 반감의 분위기를 본능처럼 안고 자랐을지 모른다”고 쓰여 있다.
 
■ 일생의 동반자 강평국·최정숙 만나다

고 선생은 가파도에서 서당을, 하모리에서 학교를 처음 접했다.

고 선생은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에 가출할 만큼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본지 1978년 6월 13일자에 보도된 ‘내가 살아온 길’에 따르면 고 선생은 “열 살 때 야학을 다니고 싶어 집에서 4㎞나 되는 학교를 그것도 밤에 부모 돈 엽전 9닢을 가지고 처음 나갔다”며 “야학에서 공부하다가 아버지 손에 붙잡혀 집에 오는 날 잠자리에 들고서도 잠결에 헛소리로 글을 읽자 그제야 부친께서도 공부를 허락해주셨다”고 밝혔다.

부모의 지원으로 제주성내에 있는 신성여학교에 진학한 고 선생은 월반을 거듭하며 5년제 학기 과정을 2년 만에 마치고 당당히 신성여학교 1회 졸업생이 됐다.

특히 고 선생은 신성여학교에서 훗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강평국과 최정숙을 만나 일생의 동반자로서 깊은 우정을 쌓았다.
 

■ 도끼로 문을 부수고 독립을 외치다

1916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이사 경성여고보)에 편입한 고 선생은 일제의 부당한 가르침에 저항했다.

고 선생은 일본인 교사 시바다가 미술시간에 일장기를 그리도록 지시하자 몰래 태극기를 그렸고, 나아가 강평국, 김일조, 노순렬과 함께 ‘국기동지회’를 결성해 하얀 천에 그린 태극기를 소매 안에 꿰매고 다녔다.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고 선생의 항일정신은 더욱 커졌다.

고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중 한 명인 박희도의 지도를 받아 교내에서 3·1 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1일 ‘거사’의 날이 밝았지만 학교 담 너머에서 독립선언서 뭉치를 발견한 교사들은 기숙사 문을 굳게 잠가버렸다.

하지만 학교 밖에서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들려오자 고 선생은 손도끼를 들고 기숙사 문을 부숴 전교생과 함께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짖었다.

고 선생의 항일정신과 용기로 경성여고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교생이 만세 운동에 참여한 학교로 역사에 남았다.
3·1운동 주도는 일제의 감시로 이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논산에서 교편을 잡고서도 독립금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독립 운동에 나선 고 선생은 한층 더 심해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또 1년 만에 일본으로 도망 다녀야했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배포된 고수선 선생의 벽보.

■ 제주 여의사 1호·부부 의사 1호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 결국 종로경찰서에 연행돼 모진 고문까지 받았던 고 선생은 1920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본지 1978년 6월 18일자에 보도된 ‘내가 살아온 길’에 따르면 고 선생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경찰은 ‘다시는 독립운동을 않겠다’는 내용의 자필 각서를 요구했다”며 “이에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학생신분이기 때문에 먹혀들지가 않았다.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 훌륭한 사람이 되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썼다”고 밝혔다.

고 선생은 각서의 내용대로 경성의전에서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 1926년 3월 졸업장을 따내며 제주 최초의 여의사가 됐다.

이후 개성에서 잠시 의사로 근무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고 선생은 ‘제주도 의사 1호’이자 현대의학의 선각자로 평가받는 김태민씨를 만나 1927년 결혼했다.

고 선생 부부는 제주도 최초의 ‘부부 의사’라는 또 하나의 수식어를 달고 제주에서 ‘장춘의원’을 운영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봤다.
 
■ 미래를 걸었던 거인

고 선생은 1933년 일본인 상점의 폭리를 견제하기 위해 현재의 서문통에 ‘공익상회’를 열고 면포와 곡물, 식료품, 잡화 등을 판매했다.

고수선 평전에 따르면 당시 고 선생은 제주사회의 민족소비운동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요시찰 대상이었던 고 선생은 일본의 감시가 더욱 극렬해지자 1944년 목선을 대절해 가족들을 태우고 충남 강경으로 피신했다.

강경에서도 장춘의원을 열고 환자들을 돌봤던 고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지만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목숨을 건 피난길에 올랐다.

고 선생은 강경 피신 7년만인 1951년 제주로 귀향했다.

당시 제주는 4·3과 6·25의 여파로 이재민과 피난민들로 들끓었다.

이에 고 선생은 제주읍성 동쪽에 마련한 저택 ‘운주당’에 한글강습소, 무료조산원, 모자원, 영아수용소, 홍익보육원, 제주국악원, 인당무용학원, 인당민속무용예술단 등을 설립해 도민들을 위한 사회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 여성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1952년 제1대 제주도의회 의원선거와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현대 정치에 처음으로 도전장을 내민 여성 정치인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외에도 1967년 보육시설인 선덕 어린이집을 설립했으며, 대한노인회 제주도연합회장, 예총 도지회장 등을 맡아 지속적으로 사회공헌을 하다 1989년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독립 운동가이자, 의사, 교육가, 사회사업가, 여성운동가, 정치인으로 살아온 고 선생은 제주와 우리나라의 역사 그 자체다.
‘민족의 수난기에 태어나 겨레와 함께 희소노매의 젊음을 보내셨고, 조국이 광복된 뒤로는 무야의 봉사로 헌신하신 자취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의표가 되었다’라는 조사(弔詞)에서 드러나 듯 고 선생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사회와 국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미래를 걸었던 거인’ ‘제주여성 1호’로 대표되는 그의 삶이 후대에도 길이 전해져야 할 이유다.

고수선 선생의 정신 서려있는 선덕 어린이집은

 

김률근 이사장
김률근 이사장

1967년 고수선 선생이 설립한 선덕 어린이집은 현재 그의 아들인 김률근 이사장이 운영하고 있다.
선덕 어린이집의 원훈은 ‘튼튼한 어린이, 따뜻한 어린이, 똘똘한 어린이’다.
김 이사장은 “교육기관들은 보통 ‘지덕체’를 강조하지만 어머니는 ‘체덕지’를 우선했다”며 “의사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건강한 신체를 기반으로 덕과 지를 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얘기했다.
선덕 어린이집에서 추구하는 ‘어린이상’은 앞날의 우리 민족의 기둥이 되도록 성장하는, 즉 한민족의 기본 정신인 홍익인간으로 자라는 어린이다.
‘애국애족’과 ‘홍익인간’을 중요시했던 고 선생의 정신의 그대로 스며들었다.
김 이사장은 “유아기 때 정립된 인격이 평생 영향을 끼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1~2년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으로 전환하지 않고 반세기 넘게 어린이집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어머니의 뜻을 후대에 알려 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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