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의 성공 신화…애향심으로 제주 발전 이끌다
‘작은 거인’의 성공 신화…애향심으로 제주 발전 이끌다
  • 고경호 기자
  • 승인 2018.12.1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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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에 현해탄 건너 고난·역경 타향살이
전기제작소 발판 ‘유기화학 그룹’ 성공
4·3 피해 고향 가시리에 쌀·옷감 지원

가난이 싫어 고향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피와 땀으로 돈을 벌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에서 모든 걸 잃었다. 고향이 싫을 법도 하지만 지극한 애향심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는 결국 기업가로 성공해 고향과 제주, 조국에 헌신한 재일제주인의 모범으로 우뚝 섰다. 일평생 고향을 사랑했던 고당(古堂) 안재호(安在祜) 선생의 삶을 고광명 전 제주대 재일제주인센터 연구원이 집필한 「재일(在日)제주인의 삶과 기업가활동」과 가시리 주민들의 기억을 통해 들여다봤다.

■ 13세 나이에 현해탄 건너다
고당 안재호 선생은(1915~1994년) 공립표선보통학교(가시리초등학교 전신)를 졸업하자마자 13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주도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에 터전을 잡은 안 선생은 일을 하면서도 오사카죠토상업학교를 졸업하는 등 학업을 이어갔지만, 어려운 형편에 발목 잡히면서 결국 1930년 오사카합성수지화학연구소에 입사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4년간 합성수지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안 선생은 1934년 대동라이트주식회사의 공장장으로 이직,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 연일 구슬땀을 흘렸다.
머나먼 타지에서 고난과 역경을 버텨내던 안 선생에게 드디어 귀향의 기회가 생겼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조국이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안 선생은 고향 제주에 공장을 차리기 위해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각종 기계와 설비를 마련했다.
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곤경에 빠져 있던 수만명의 재일 한인들을 수송하기 위해 100t급 기범선도 구입했다.
그렇게 안 선생은 부푼 기대감을 안고 기계와 설비, 200여명의 재일 한인을 기범선에 실어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급유를 위해 오사카 시리나시가와에 기항하던 기범선이 전쟁 때 폭파된 배와 충돌하면서 좌초되고 말았다.
다행히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지만 기계와 설비들은 물에 젖어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기범선은 좌초됐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안 선생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안 선생은 식료품 장사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일본 규수 지역에서 생고구마 1만관, 말린 고구마, 쌀, 돼지를 대량 구입해 또 다시 고향을 향한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쟁 중 폭침된 선박의 잔해에 배가 충돌하면서 전 재산을 들여 구입한 식료품 모두를 바다에 묻고 간신히 목숨만 구했다. 단 두 번의 사고로 다시 가난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이다.

■ 그룹 이끄는 경영인으로 성공
안 선생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이내 재기에 성공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신념으로 여겨 온 성실과 인내, 신용 덕분에 주변 지인들과 단골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융통해 그를 지원한 것이다.
안 선생은 1946년 4월 야스모토 전기제작소를 열고 새롭게 출발했다.
당시에는 모든 게 부족한 시대였기 때문에 안 선생이 생산한 배선 기구는 만들기 바쁘게 팔려 나갔다.
1950년 고용 인력 500명 규모의 기업을 일궈낸 안 선생은 사업 확장을 위해 치바현 이치가와시에 공장을 신설하고 생산 분야의 다양화를 추진했다.
안 선생은 1950년 8월 사명을 일본유기화학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1952년 플라스틱 단추를 생산하는 일본단추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안 선생이 생산한 단추는 1960년대까지 일본 내 단추 생산량의 70%를 점유할 만큼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외에도 안 선생은 일본화성공업㈜, 일신화학공업㈜, 동경유기㈜, 호쿠리코화성공업㈜, 야스모토흥산㈜, 대한합성화학공업㈜, ㈜영안 등을 연이어 설립하면서 ‘유기화학 그룹’을 이끄는 경영인으로 거듭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 가만히 있으면 고향 생각만
공장장에서 중소기업 사장으로, 나아가 그룹 회장으로 승승장구하면서도 안 선생의 마음 한편에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향심이 가득했다.
더욱이 제주4·3 당시 아버지가 희생되고, 가시리 마을 자체가 소개되자 고향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다.
오상식 전 가시리장(82)은 “4·3 당시 소개령으로 집이 모두 불타고 가축들도 다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생물’ 자체가 없었다”며 “마을의 소식을 접한 안 선생은 1949년 정월 명절에 맞춰 고향에 쌀과 옷감을 보내왔다. 그게 안 선생의 첫 지원이었다”고 회상했다.
오국현 할아버지(85·가시리) 역시 “당시 가시리 사람들은 전분공장에서 나온 찌꺼기와 이시돌 목장에서 받은 모래 섞인 닭 사료를 먹을 정도로 궁핍했다”며 “안 선생이 없었으면 모두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선생은 4·3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복원하기 위해 인근 세화리로부터 전신주를 이어와 가시리에 전기를 공급했다.
오 전 이장은 “안 선생은 ‘노인들이 전기불이라도 한 번 사용해보고 죽어야 될 거 아니냐’며 세화리에 지원금을 주고 전깃줄을 끌어왔다”고 얘기했다.
이외에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아야 한다며 라디오와 앰프 등 음향 시설을 기증했으며, 후손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 부지와 마을 공동체 복원을 위한 리사무소 부지를 기부하는 등 가시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아낌없이 지원했다.
오 전 이장은 “1975년에는 안 선생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아 숙원사업이었던 마을도로를 개설했다”며 “당시 목장 토지주들과의 갈등 때문에 도로를 더 길게 내지 못했는데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안 선생은 ‘그 때 나에게 얘기해줬으면 토지들을 다 매입했을 것 아니냐. 가시리에서 제주시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만들고 싶었는데 왜 얘기를 안했느냐’고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안 선생의 사회 공헌은 가시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제주 전체의 발전을 위해 육영사업, 감귤진흥, 전화·전기, 수도, 도로포장, 문화·체육·새마을 사업 등 지역사회 모든 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고향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연락이 오면 무조건 ‘쾌척’이었다.
실제 1963년 당시 제주도립병원에 의학 서적을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청에 고성능 쾌속정 희사, 제주도교육위원회에 학교시설 기증, 제주대학교에 도서관 등 비품구입 성금 기증, 제주예총에 한라문화제 성금 지원 등 안 선생의 도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안 선생이 고향에 지원한 기부 규모는 약 1억6000만원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다.
오 전 이장은 “안 회장은 ‘내가 가시리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지만 본인들의 노력 없이 공짜로 부자가 되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마을 주민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지원했던 것”이라며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돈 벌 생각만 했지만 나이를 먹다 보니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향 생각밖에 안 난다’는 그의 말에는 고향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가득 묻어있었다”고 회상했다.

고당 안재호 선생은…

고당 안재호 선생은 1915년 1월 23일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부친 안승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3살 때 모친 고종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후 성읍리 출신의 송성춘과 결혼해 5남4녀를 두었다. 평소 후손들의 일본화를 예방하기 위해 아들은 고국에서 성장해 교육 받은 사람을 며느리로 삼고, 딸은 가급적 고국으로 출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안 선생의 철저한 조국애와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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