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제주섬에서 길어올린 '절대 고독'...세계인 감동
척박한 제주섬에서 길어올린 '절대 고독'...세계인 감동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8.11.2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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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주인] 10. '폭풍의 화가' 故 변시지 화백

20대 때 일본 최고 권위 광풍회전 최고상 수상 등 파란
민족의식 밀려들어 귀국...중앙무대서 한국적 화풍 탐구
44년 만에 귀향, 기존 기법 버리고 제주 조형 언어 천착
토착정서 반영한 '척박한 그림' 제주화-변시지풍 완성해
인간 실존적 감흥...야후 선정 '세계 100대 화가' 등 명성
변시지 작 - '아침'(500호)
변시지 작 - '아침'(500호)

폭풍의 화가변시지 화백(1926~2013)은 붓으로 제주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일본과 서울을 돌아 50줄에 제주로 귀향한 변 화백은 젊은 시절 명성을 안겼던 인상파적 사실주의 기법을 모두 버리고 섬의 근원과 잇닿은척박한 그림에 천착한 끝에 독보적 화풍을 일궜다.

태풍에 고립된 섬을 무대로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조형언어로 풀어낸 그의제주화는 처연함과 아련함으로 가득하고, 절대 고독이 관통한다. 제주를 닮았다. 아니, 제주 자체다.

변 화백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97년 야후가 선정한세계 100대 화가에 이름을 올렸고 세계 유수의 예술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피카소와 고흐, 모네, 밀레 등과 함께 소개됐다.

변 화백의난무’, ‘이대로 가는 길’ 2점은 세계 최대 규모인 미국 워싱턴DC 소재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2007 6월부터 10년간 임대전시됐다. 동양인 작품이 그곳에 전시된 것은 변 화백이 최초였다.

 

20대 조선인, 일본 최고 작가 반열에 오르다

변 화백은 1926 5월 서귀포시 서홍동에서 태어났다. 54녀 중 넷째였다.

6살이던 1931년 변 화백은 부친을 따라 도일해 오사카에 정착했다. 힘이 셌던 변시지는 소학교 2학년 때 덩치 큰 일본 학생과 씨름하던 중 다리를 다쳤다. 그때 오른쪽 대퇴부 관절을 다친 후 평생 지팡이를 짚었다. 뛰어놀지 못하게 되자 그림에 매달렸다.

변 화백은 1942년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1945년 졸업한 후 도쿄로 이사해 아테네 프랑세즈에서 불어를 공부했고, 데라우찌만지로 문하에서 본격 작가의 길을 걸었다.

변시지는 1947년 일본 최고 권위 미술상인 광풍회(光風會) 공모전에겨울나무’ 2점을 출품해 입선했고 그해 가을에는 일본 정부가 주최한 일전(日展)에서여인이 입선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이 작품을 인정하면 기존 대가들의 그림이 위험하다고 우려했을 만큼 참신했다.

급기야 이듬해인 1948년 변 화백은 제34회 광풍회전에서베레모의 여인등으로 최고상을 받았다. 새파란 조선인 청년이 광풍회전 최고상을 받은 건 파란이었다. 심사위원회는 일본 최고 작가란 칭호를 붙여야 할지 심한 논쟁을 벌였다. 당시 NHK 뉴스에도 보도될 정도였다.

젊은 시절 변시지 화백(앞줄 가운데)이 일본에서 활동하던 당시 모습.

서울 거쳐 고향 제주로구도인 삶을 살다

변 화백은 일본에서 승승장구할수록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이 밀려들었다.

1957년 그는 서울대 미대 교수 초빙을 계기로 귀국했다. 길지 않은 서울대 교수 시절 우리 것을 연구하고 한국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서울생활 당시 변 화백은 매일 고궁을 찾아 붓을 들었고, 창덕궁(옛 비원)을 많이 그려비원파로 불렸다. 정자 기왓장 수까지 실제와 똑같이 그릴 만큼 섬세한 화풍을 구사했다. 당시 그의 모든 작품은 일본 화랑으로 팔려나갔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 화단은 양분된 채 파벌 싸움에만 혈안이었다. 싫증을 느낀 변 화백은 적당한 타협이면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음에도 스스로 구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한국 화가들의 해외 진출이 붐을 이루던 1975년 그는 거꾸로 고향을 향했다. 오사카로 떠난 지 44년 만에 고향에 정착한 변 화백은 실존적 반성을 통한 제주 정체성 탐구에 몰입했다. 화려한 채색은 제주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원파 기법을 모두 버렸다.

세상과 담을 쌓고 3년간 오롯이 제주 풍토를 반영한척박한 그림에 천착한 끝에 독창적 색감과 색채를 발견했다. 황톳빛이 온통 화면을 뒤덮었다. 바람은 태풍으로 회오리쳤다.

변시지풍의 완성이었고, 제주화의 탄생이었다. 제주를 그리되 껍데기를 걷어내고 순수와 원시의 빛깔을 입힌 결과였다. 특정작가 화풍에 지역명이 붙은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

변 화백은 생전비행기에서 본 제주의 풍경에 문득 황금색이 눈에 들어왔다. 경외감을 느꼈다. 그것은 숙명이었다제주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설파했다.

척박한 그림에 대해 변 화백의 장남인 변정훈 아트시지 이사장(55)사실주의에 입각해 풍경을 아름답게 그렸던 화풍이 확 바뀌자 일본과 서울 화랑에서 왔다가 자기네 정서와 안 맞는다고 돌아갔다중학생이던 나는 아버지의 그림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변 이사장은나이가 들고 나서 아버지의 뜻을 이해했다당시 화랑의 주문은 제주풍경을 일본 광풍회 때나 서울 비원파 시절처럼 아름답게만 그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신 것이었다. 제주 풍경은 비원풍으론 절대 그릴 수 없다고 깨달으신 것이었다고 전했다.

변 이사장은 변 화백의 작품을 ‘30금 그림으로 표현했다. 변 이사장은적어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30세가 되기 전엔 거칠고 척박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변시지 화백
故 변시지 화백

제주 정체성은 황톳빛 고독세계인 사로잡다

제주화는 마음으로 보는 제주 풍경이자 풍토이고 섬의 정체성과 같다.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움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정서가 절절하게 묻어난다. 섬의 태생적인 고독과 기다림, 은둔, 한없는 외로움이 관통하며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무소유의 철학도 읽힌다.

제주화는 보는 이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제주 정체성에서 비롯된 극단의 고독이 세계인의 보편적인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토착정서의 발굴 속에 장대한 대자연의 율동을 담아내고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생명형상을 화면에 담아냈다는 세계적 평가가 잇따랐다.

변 화백은 생전에제주는 순수하고 단순하며 깊은 원시를 향한 향수라며바다의 약동하는 생명력은 창작활동의 근원이며 자연의 생이야말로 무한하고 영원한 꿈이라고 갈파했다.

변정훈 이사장은제주 정체성을 반드시 지켜야한다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예전 서복전시관 앞에 돌담이 쌓이자 제주를 모두 망가뜨렸다고 안타까워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변 이사장은부친이 강조한 제주 정체성의 핵심은 도민의 강인한 정신이었다바람 불면 씨앗 날리는 보리밭을 일구는 농부와 폭풍우를 뚫고 물질 나서는 해녀, 곧 도민들이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삶을 일궈온 강인한 정신이 곧 제주 정체성의 요체였다고 강조했다.

 

 

공익재단 아트시지는...

"변시지 미술관 건립 추진...제주 세계에 알릴 것"

 

변정훈 이사장
변정훈 이사장

공익재단 아트시지(이사장 변정훈)는 변시지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아트시지는 변 화백의 12녀 중 둘째이자 장남인 변정훈 이사장(55)을 포함해 이사 5명과 감사 2명으로 구성됐다. 변 화백이 타계한 이듬해인 2014년 설립돼 유화, 수묵화, 판화, 조각, 스케치, 도자기, 파스텔화를 망라하는 변 화백 작품 1300여 점과 유품 등을 소장하고 있다.

변정훈 이사장은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행정당국 지원을 받지 않고 재단 차원에서 미술관을 지어 모든 작품과 함께 기부 채납할 계획이다. 일생을 올곧게 사셨던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한 것이라며세계인에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고, 제주를 세계에 알리겠다고 밝혔다.

변 이사장은제주화이기 때문에 변시지미술관은 반드시 제주에 지을 생각이라며서귀포에는 이미 아버님 때문에 생긴 시립 기당미술관이 있기 때문에 서귀포를 벗어난 지역에 짓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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