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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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11.2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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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제주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논설위원

짧은 일정으로 서울을 다녀왔다. 마침 지인의 49재 참석도 겸한 일정이었다. 올해 서울 첫 폭설을 기록한 날 다음 날이 49재였다. 49재 장소가 북한산 언저리 어느 절이었기 때문에 산행은 불가피했다.

서울행 며칠 전 무리한 개인 일정으로 당일 산행이 힘들겠다고 판단한 후 불참을 결심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못해 뒤늦게 길을 나선 참이었다.

택시를 타고 절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차했다. 택시 기사분도 나와 같은 심각한 길치였는데, 현대의 이 어마무시하게 똑똑한 내비게이션을 극찬하고는 나를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근처에 내려 두고 홀연히 떠나갔다.

내가 내린 곳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길을 따라 산에 오를 수 있는 곳까지 꽤 걸어갔다. 북한산 둘레길이 시작되는 어느 지점에 가니 내가 가야 할 절이 이정표에 있었다.

드디어 산행이 시작됐다. 전날의 폭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준비 없이 나선 나는 봄나들이 가는 가벼운 옷차림에 런닝화였다. 눈이 내린 산에 런닝화니 엄청난 궁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행하시는 분들의 눈에는 산에 있는 절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대책 없이 나들이 나왔다가 어제 내린 눈에 산에서 하룻밤쯤 견뎌낸 몰골이었으니 적어도 내가 산행에서 만난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딱이었다.

한참을 걸어갔다. 걸어도 걸어도 찾는 절은 나오지 않았고 백두산 천지쯤이나 올랐다고 판단될 때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나이 지긋한 산행자를 만났다.

그 분께 내가 가는 절을 물으니 눈에 보이는 저 산꼭대기만 넘어가면 그 절이 있단다. 이미 천지까지 다 왔는데 저 하늘보다 높은 꼭대기를 넘으라신다. 올라온 길이 너무 아쉽게 느껴져도 지금의 복장으로는 온 길을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이셨다.

사실 이미 정상에 올라온 것 같은 나는 다시 산 정상 하나를 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냉큼 그 분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분을 따라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그 분은 왜 그 절을 가야 하는지를 물으셨고, 하산 후 다시 그 절에 갈 수 있는 또 다른 코스의 시작점으로 나를 데려다주셨다. 내가 택시에서 내렸던 곳에서 불과 30m 떨어진 지점이었다.

내비게이션이 거의 다 왔다고 한다며 내려주신 호쾌한 기사님이나 이것저것 안 가리고 내린 곳에서 전진만 했던 환상적인 길치커플의 탁월한 선택에 나는 가슴을 쳐야만 했다.

다시 산행이 시작됐다. 앞선 산행에서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지친 나는 목표물 위치는 정확하게 조준하고 있었으나, 체력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다시 한 시간 반 정도의 산행을 하고 목표 지점을 700m 앞두고 있었을 때 이미 49재를 마치고 내려오는 지인을 만났다.

그 지인은 나의 몰골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 복장에 거기까지 올라간 나를 보고는 그냥 돌아가자고 권유했다. 남은 거리로만으로는 포기하고 내려오기에 너무나 아까웠지만 목표를 달성하고 다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이 눈으로 뒤덮인 가운데 하산마저 엄청난 고난의 행군이었다. 마침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제일 많이 마주친 순간에 나의 런닝화는 보란 듯이 위력을 정확히 과시했다. 스키 타는 자세로 기대 수준 이상의 포즈로 넘어진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귀에 들려오는 말.

그 신발로 산행은 안 되시죠”, “위험해요.”(네네~)

올라간 여정이 억울해 남은 거리를 갔다면, 두 발로 제주도를 밟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의 고집과 객기였다면 지인의 한 마디로 남은 목표를 과감하게 접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서는 판단도 나 자신에 대한 용기였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 게 옳았었을까 아니면 도중에 포기하고 하산한 게 잘한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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