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었다” 포기 모르는 제주인의 긍지 자부심
“두려움 없었다” 포기 모르는 제주인의 긍지 자부심
  • 고경호 기자
  • 승인 2018.11.21 1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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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주&제주인] 9. 문봉만 ㈜원우ENG 회장
문봉만 ㈜원우ENG 회장

도전정신, 그리고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의지. 거친 바다에 둘러싸여 살아야했기에 체득할 수밖에 없는 제주 섬사람의 강점이다. ‘쇳소리 나는 일을 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한 길만 걸어온 문봉만 ㈜원우ENG 회장(64)은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하고, IMF 한파로 회사가 무너졌을 때에도 ‘뚝심’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19일 본보에서 만난 문 회장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이 짧은 한 마디에는 제주인으로서의 커다란 자부심이 깊이 배어있었다.

■ “쇳소리 나는 일 해야 한다”

문 회장이 유년시절부터 키워온 꿈은 ‘공장장’이었다.

당시 제주에는 대형 공장이 없었고, 조선업이나 철공소가 발전하지 않았지만 문 회장은 어머니의 ‘신신당부’ 때문에 ‘공장을 차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문 회장은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점(占)을 보고 오시더니 ‘너는 무조건 쇳소리 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한두 번이 아니고 유년시절 내내 귀가 닳도록 그 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문 회장은 1973년 제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인하대 공대에 입학해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어머니의 당부가 큰 몫을 했지만 문 회장 역시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쇳소리 나는 일’에 큰 흥미를 느꼈다.

대학 재학 중 육군 ROTC(15기)에 임관한 문 회장은 1979년 전역과 동시에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문 회장은 “당시 형님이 삼성에서 근무했다”며 “형님께서 같은 회사에서 밥 얻어먹지 말자고 하셔서 제주하고 가까운 현대중공업에 들어갔다”고 웃으며 얘기했다.

■ 세상에 대한 두려움 사라지다

현대중공업에서 문 회장이 맡은 일은 공정 과정을 살피는 ‘검사’ 업무였다.

해양산업부에서 근무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등 해외 공사 현장을 누볐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높은 기술력으로 해외 각국으로부터 해양플랜트 등 대형 공사를 수주했다.

문 회장은 “그 때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건국 사상 최대인 3억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해외 각지에서 대형 공사가 밀려왔다”며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계획대로 공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문 회장은 한 달 30일 중 29일을 바다 위에서 일하면서도 ‘공장장’이라는 목표를 되새기며 모든 업무에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일부 공정이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생산부서 및 외국인 파트너들과 머리를 맞대 원인을 찾아 개선했으며, 검사 업무와 상관없이 본사 소속 공장들을 찾아다니며 설비 과정을 공부했다.

문 회장은 “틈틈이 시간을 쪼개고, 쉬는 시간을 반납해 가며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고생인데 그 때는 전혀 힘들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났다”고 말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리로, 또 과장으로 ‘특진’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문 회장은 1987년 1월 33세의 나이에 돌연 사직서를 냈다.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문 회장은 “하루에 3~4시간씩 자면서 일을 하다 보니 내 마음 속에는 ‘뭘 하든 이렇게만 일하면 먹고 살 수 있겠다’라는 확신이 생겼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라며 “정 안되면 리어카를 끌고 장사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박차고 나와 본격적으로 창업 준비에 나섰다”고 회상했다.

■ 피하지 못한 IMF 한파

퇴사 후 중소기업에 입사해 1년 6개월 간 유압 등 설비 과정과 전반적인 회사 경영 노하우를 습득한 문 회장은 1989년 35세의 나이에 ‘원우금속’을 창업했다.

원우금속의 주요 생산품은 버킷과 붐, 암, 카운터웨이트 등 굴삭기에 필요한 핵심 부품이었다.

문 회장은 생산해 낸 다양한 부품들을 현대중공업과 한라중공업, 포항제철 등 대기업에 납품하면서 단숨에 유망 중소기업체로 우뚝 섰다.

그러나 원우금속도 IMF의 한파는 피하지 못했다.

1997년까지 연간 100억원대의 매출과 120명의 직원을 고용한 알짜기업이었지만 1998년 IMF 사태로 주 거래처였던 한라중공업이 부도나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문 회장은 “한라중공업 부도로 한 달 매출이 8억원대에서 3억원대로 곤두박질쳤다”며 “돈을 융통하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계속 돌아오는 만기 어음을 막지 못하면서 결국 부도를 피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위기는 계속됐다.

100만 달러 규모의 미국 수출 건이 계약 성사 직전에 물 건너갔고, 서울 당산철교 강북 구간 철교 부품 납품건도 주민들의 민원으로 지연되는 등 원우금속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들이 줄줄이 실패한 것이다.

문 회장은 “채권자가 고용한 조직폭력배가 나를 납치하고 공장 설비까지 빼앗아갔다.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며 “교사였던 아내의 월급도 압류됐고 고3이던 아들은 친구 집에서 공부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문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뺨을 맞으면서도 일일이 채권단을 찾아가 회사를 살릴 수 있다고 절규했다.

직원들에게는 회사의 재무 상태를 투명하게 공개해 모든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문 회장의 눈물겨운 사투에 직원들이 먼저 움직였다. 십시일반 월급을 모아 문 회장에게 3100만원을 건넸다. 제2공장은 속수무책으로 털렸지만 제1공장은 직원들이 주야로 비상 대기조를 결성해 지켜냈다.

문 회장의 의지에 직원들의 노력이 더해지자 채권단도 감복했다. 

문 회장은 “그 때는 회사를 살릴 수 있다는 신념뿐이었다”며 “직원들과 채권단이 회사 재기에 대한 믿음을 갖고 나서부터 차츰차츰 정상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위기 뒤 더욱 단단

문 회장은 1998년 원우금속을 법인으로 전환해 ㈜원우ENG로 다시 시작했다.

위기를 겪은 뒤 더욱 단단해진 ㈜원우ENG는 더욱 기술력을 키워 현재 연 매출 300억원 규모를 자랑하는 견실한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도 굴삭기의 핵심부품을 공급하면서 콘크리트 펌프카의 주요 부품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만 하역에 쓰이는 대형 버켓과 해양 공사에 쓰이는 준설용 버켓, 땅을 평평하게 다지는 진동 롤러 등 지속적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바코드 기술을 도입해 모든 공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시간 생산 관리 시스템’(RPMS)을 도입하는 등 4차 산업혁명에 맞서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문 회장의 꿈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연 매출 700억 이상의 강소기업을 키워내는 게 그의 마지막 목표다.

문 회장은 “앞으로 10년 안에 원우ENG를 강소기업으로 만들고 싶다. 또 충분히 실현가능하다고 자신한다”며 “이와 함께 원우ENG의 기술력과 생산 부품들이 고향 제주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제주인의 도전정신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며 “어떠한 어려움도 끝까지 맞서 극복해내는 제주인의 뚝심을 제주출신 상공인으로서 널리 알려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문봉만 회장은…

문봉만 ㈜원우ENG 회장은 1954년 제주시 이도1동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아버지와 도평초를 세운 집안의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공장 설립에 대한 꿈을 키웠다. 광양초와 제주제일중, 제주제일고, 인하공대를 졸업한 문 회장은 현대중공업을 거쳐 경주시 외동읍에 현재의 원우ENG를 창업해 운영하고 있다. 제주출신 상공인으로서 현재 울산제주특별자치도 도민회장과 재외제주경제인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고향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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