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했던 우리 오빠…이제라도 편히 누워 쉬었으면”
“다정했던 우리 오빠…이제라도 편히 누워 쉬었으면”
  • 고경호 기자
  • 승인 2018.11.21 2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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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길 할머니, 16일 4․3 때 행불된 오빠 유해 찾아
21일 위패 모셔진 4․3평화공원 봉안소 방문해 오열
21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만난 양유길 할머니가 위패봉안소에 안치된 둘째오빠 故 양묘길씨의 위패를 가르키고 있다. 사진=고경호 기자 
21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만난 양유길 할머니가 위패봉안소에 안치된 둘째오빠 故 양묘길씨의 위패를 가르키고 있다. 사진=고경호 기자 

“둘째 오빠는 참 다정했습니다. 매일 저를 등에 업고 멀지도 않은 학교에 데려다줬습니다. 그런 오빠가 백골이 되어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너무 반가운데 눈물이 펑펑 나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21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만난 양유길 할머니(82)는 둘째 오빠의 위패를 하염없이 쓰다듬다 눈물을 쏟아냈다.

70년 세월동안 가슴에 묻어둔 오빠가 이제는 할머니가 돼 버린 동생의 주름진 눈에서 눈물로 흘러나왔다.

제주4․3평화재단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제주국제공항 인근에서 400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현재까지 92구의 유해가 유전자 감식을 통해 유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양 할머니도 매년 생사조차 모르는 오빠들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다 지난 16일 ‘추가로 신원이 확인된 29구의 유해에 둘째 오빠인 양묘길씨가 포함됐다’는 소식을 받았다.

양 할머니는 “죽어서라도 돌아와서 정말 반가웠다. 너무 기뻤다. 그런데 작은 오빠에 대한 기억만 떠올리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내 아이들은 외삼촌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오빠들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 그동안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양 할머니의 기억 속 작은 오빠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했다.

양 할머니는 “1949년이었다. 오빠를 찾기 위해 서문통을 돌아다니는데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웅성대기에 쳐다보니 그 안에 속옷만 입은 오빠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었다”며 “손짓으로 집 방향을 가리켰다. 빨리 집에 가라는 표시였다”고 회상했다.

오빠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집에 돌아온 양 할머니는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다급하게 전하는 얘기를 들었다.

양 할머니는 “둘째 오빠가 정뜨르 비행장에서 총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믿지 않으셨다”며 “나도 오빠가 죽었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작은 오빠는 4․3의 광풍에서 양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잠시 제주에 내려왔다가 군경에 붙잡혔다.

이보다 앞서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하던 큰 오빠 故 양해길씨도 가족들을 서울로 데려오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가 마포형무소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됐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고향을 찾은 오빠들이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은 당시 12살이던 양 할머니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극이었다.

양 할머니는 “행방불명된 오빠들을 찾아 헤매다 결국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전주를 거쳐 서울로 이사 갔다”며 “2007년 다시 제주로 돌아올 때까지 반세기동안 오빠들을 가슴에 묻었다. 둘째 오빠는 이렇게라도 찾았지만 첫째 오빠는 여전히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제주4․3 당시 억울하게 죽어 차가운 땅 속에 파묻힌 유해들을 발굴하고 있는 평화재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작은 오빠의 유골은 여기 평화공원에 안치하고 싶다. 70년간 땅 속에서 뒤엉킨 희생자들과 이제라도 편안하게 누워서 쉬길 바랄뿐이다”고 얘기했다.

고경호 기자  k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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