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섧고 섧다’고만…
세상이 ‘섧고 섧다’고만…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8.11.1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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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 한중록(恨中錄)을 꺼내 읽어 봤다. 이 책은 조선시대 21대 영조(英祖)의 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부인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쓴 회고록 형식의 글이다.

영조 38(1762) 삼복더위 여름 날. 아버지 영조는 대궐 안뜰에 뒤주를 갖다 놓고 아들 사도세자를 그 속에 가둬놓고 굶어 죽게 한다. 사도세자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몇날 며칠 살려달라는 통곡소리가 대궐을 울렸다. 이 실재의 참사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의 부인 홍씨가 만년에 자기의 일생을 회고한 만록(漫錄) 및 사실(事實)의 기록이 한중록이다. 순 한글만으로 쓰여진 것으로서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사본이 있는 데, 문장이 섬세하고 아담한 궁중체(宮中體)로 돼 있다.

이 책을 새삼 꺼내 든 것은 이 처절한 사건 속에 숨은 진실의 한 꼭지를 다시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요즘 시중 화제가 온통 혜경궁. 혜경궁하는 까닭이다.

 

화제의 초점은 혜경궁 홍씨가 아니라 혜경궁 김씨다. 이 사건은 2016년으로 대선후보 경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해 1231일 혜경궁 김씨(정의를 위하여@08_hkkim) 계정의 트위터에 게재된 글이 문제가 된다.

(재인)후보 대통령되면 꼭 노무현처럼 될 거니까 그 꼴 꼭 보자고요. 대통령 병 걸린 X보다는 나으니까.”

당시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혜경궁 김씨계정 사용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방 글을 패륜 수준으로 올리면서 비난이 이어졌다.

이후 지난 49일 경기도지사 더불어민주당 후보경선이 한창일 때 당시 이재명 후보와 경쟁하던 전해철 후보 측에서 혜경궁 김씨를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면서 공론화됐다. 트위터 아이디의 이니셜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이재명 후보의 부인 김혜경씨가 이 트위터 계정의 주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이 지사 측은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지난 주말 경찰은 혜경궁 김씨트위터의 계정주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부인 김혜경씨라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 검찰은 김씨를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 공표) 및 명예훼손 등 혐의 기소의견으로 송치할 것을 지휘했다. 이 희극적 사건은 이제 비극(悲劇)으로 가고 있다.

 

혜경궁이란 이름 탓일까. 한중록에도 혜경궁에 살았던 사도세자의 부인 홍씨의 한()이 배어있다. 사도세자의 비행이 드러나고 이를 감당할 길이 없어진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아들을 죽여서라도 종묘사직을 보전해달라고 말하는 데 이르면 가슴이 먹먹하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와 손자(훗날 정조대왕)를 지키겠다는 여인의 비장함은 무섭기까지 하다. 그리고 혜경궁 홍씨와 어린 손자에게 이 어미의 가슴을 누가 알리요~하는 대목에선 더이상 책장을 넘기기가 불편하다. 이 두 여인의 무서운 집념 탓이었을까. 영조는 훗날 손자의 지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자신이 죽였던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 시호를 내리고 밤새 제문(祭文)을 직접 지어 아들의 뒤늦은 장례식에서 읽는다. 그리고 영조는 손자를 곁에두고 가르치는 데, 훗날 할아버지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조선 중기의 빛나는 영-정조시대를 개창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독백은 오로지 하늘이 하시는 일이니 섧고 섧도다(서럽다)”이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 사도세자를 위해 시어머니 영빈 이씨와 함께 온 힘을 다했어도 참사를 막지 못한데 대한 회한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을 이르는 한자성어다.

이 문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바로 진인사대천명이다. 이 중 어느 부분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듯 하다.

요즘 우리 정치를 보면 진인사는 없고 모두가 대천명이다. 제 할일을 다하지 않고 제 뜻대로 되질 않는다고 세상이 섧고 섧다고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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