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체능 교육의 역할에 대한 단상
예체능 교육의 역할에 대한 단상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11.1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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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수 시인·문화기획가

요즘 교육 관련 뉴스들을 보면, 우리 교육 문제의 임계점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입시험 문제에서부터 유치원 등 학교급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문제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특히 학교 폭력과 청소년 자살 문제 등 청소년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고 모두 일견 타당한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꼼꼼히 되새겨볼 것들이 있다.

우리의 정신 영역은 이성과 감성의 두 영역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성은 여러 가지 논리적·합리적 기준을 근거로 하여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는 능력이며, 감성은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 반응으로서 좋으냐 싫으냐를 나누는 능력이다. 교육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이성의 영역인 옳으냐 그르냐를 구분하는 능력은 개인적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증진할 수 있으나 감성의 영역인 좋으냐 싫으냐를 제어하는 힘은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이다.

각각의 개인이 특정 사건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할 경우 이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이 동시에 활성화되어야만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경우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감성의 영역이다. 좋다싫다는 본능적인 감성적 판단이 먼저 일어난 뒤에 옳다그르다라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때 감성적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이성적 영역의 활성화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리는 흔히 우리 삶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행복은 항상 내일에 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포기해야 하고 감성의 만족보다는 이성의 충족을 위해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우리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소설과 같은 책을 읽는 시간, 영화나 연극 한 편 향유하는 시간, 오페라나 뮤지컬 한 편을 관람하는 시간, 친구들과 운동하는 시간은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시간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대학에 가거나 성인이 되고 나서 즐겨야 되는 시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은 오히려 청소년기에 필요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감성을 길러주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냥 좋으냐 싫으냐를 느끼기만 하면 된다. 청소년기에 느끼게 되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행복감을 느끼고,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자존감을 키워주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활동을 할 때는 경쟁이 목적이 아니다. 서로 공감하는 능력을 증진시켜주고 삶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직접 경험하고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러한 감성보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편을 가르고, 경쟁을 시키며, 우리가 느끼는 행복에도 1등급부터 9등급까지 급수가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다. 요즘 청소년들의 특징을 일컬으면서 2과 같은 신조어로 규정짓는 오류도 여기에 있다.

인간 발달 단계의 특성상 청소년기에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때의 감수성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감성 영역의 활성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육제도를 보면 청소년들의 이러한 감수성을 되도록 축소시키고 이성적 영역만 확대시키는 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예를 들어 학교 교육 과정에서 예체능 교과 시간을 축소시키고 겨우 존속되는 시간마저도 국어, 영어, 수학 등을 위해 희생시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군다나 방과후 수업은 온전히 국어, 영어, 수학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학원 활동까지 고려한다면 잠자는 시간을 빼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이성적 영역의 교과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학교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나 그 외의 사람들도 체육, 음악, 미술에서 를 받은 학생과 국어, 영어, 수학에서 를 받은 학생을 같은 잣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급수가 결정된다면 너무 극단적인 진단일까. 이미 국어, 영어, 수학 공부를 사교육을 통해 해결하고, 예체능교육도 성적 경쟁을 위한 교두보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오로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이성적 영역의 확충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 개인의 자존감이나 상호 공감을 키워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의 행복감을 충족시키는 방향은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죽하면 학교 정규 교과과정에서 체육 시간을 줄였다가 다시 확대하는 좌충우돌 정책을 펴기까지 했을까.

이런 양상은 대학입시에 예체능 활동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선진국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우리 학교 현장에서는 지금도 음악이나 미술 등 기타 예체능 시간을 줄이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우리 청소년들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오히려 확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언제까지 인터넷에서 미술을 배우고 노래방과 유튜브에서 음악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우리 아이들이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예체능 활동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바탕 위에 국어, 영어, 수학 같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의 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좋으냐 싫으냐하는 감성적 영역의 바탕 위에 옳으냐 그르냐하는 이성적 영역이 자리해야 한다.

그러한 위치 전도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교육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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