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 벼슬 받은 김만덕, 한 쪽 눈 눈동자 둘?
‘의녀’ 벼슬 받은 김만덕, 한 쪽 눈 눈동자 둘?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10.3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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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의 첫 의사와 여의사(8)
김만덕의 의녀 제수 기록 부분(‘승정원일기’ 책 1769, 가경(嘉慶) 1년 11월 25일조).
김만덕의 의녀 제수 기록 부분(‘승정원일기’ 책 1769, 가경(嘉慶) 1년 11월 25일조).

김만덕은 조선시대, 1790년대 전반 무렵의 대흉년기 때 자신의 재산을 털어 곡식을 사들여 와 굶주림에 허덕이던 제주민의 구휼에 기꺼이 바쳤다. 그녀는 의녀(醫女)로도 나아갔다. 그녀의 경우도 의학적 소양 혹은 의술을 지녔을까. 또한 김만덕은 한 눈에 두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그 와중에 김만덕의 눈에 대한 의학적 검토도 이뤄진다.

제주 출신의 의녀는 귀금이 성종 23(1492) 기록에 나온 이후 1796(정조 20)에 와서야 다시 확인된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을 듯싶다. 우선 의녀가 16세기 초반부터 활동이 크게 위축되어 나아간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의녀가 조정관료의 연회에 초청받고 의기(醫妓)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기녀(妓女)와 같은 역할을 맡는 일이 더욱 심화되어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로써 제주의 여의사가 중앙정부의 의료계에 나아가는 경우도 없어졌을 것 같다.

제주 출신의 의녀가 300여 년 동안 기록에 나오지 않은 것은 중앙정부가 제주의 여의사에게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왔었던 의술을 대궐 내 의녀로 하여금 배우게 했던 점도 들 수 있을 같다. 귀금이 혜민서의 의녀가 되자 정부는 귀금의 휘하로 두 명의 의녀를 보냈다. 이로부터 두 명의 의녀는 귀금이 장덕으로부터 전수받은 의술을 교습 받았다. 이로써 중앙정부의 의료계도 제주의 여의사에게 전통적으로 전수·교습이 이뤄졌던 의술을 공유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중앙정부가 전국의 여느 의사에 비해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병증 치료에 뛰어났던 제주의 여의사를 불러들이는 일이 없어졌을 듯 싶다. 그 때문에 제주 출신의 여의사가 기록에도 나오지 않게 됐을 것이다.

한편 김만덕은 정조 16(1792)~19(1795) 간 제주 대흉년기 때 재물을 내어놓아 구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부에서 포상하려 하자 그녀는 상 받기도 면천하기도 원치 않는 대신 바다 건너 상경해 궁궐과 금강산 유람하길 원한다고 했다. 그녀는 정조 20(1796) 상경했고 임금 정조는 금강산 유람에 나서는데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와 함께 정조가 김만덕을 내의원(內醫院) 행수의녀(行首醫女), 곧 수의(首醫)로 삼아 각별히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로써 김만덕이 중앙정부에서 의료 관련 업무를 맡았던 내의원 소속의 의녀 중 가장 첫 서열의 의녀로 나아갔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는 제주 출신의 의녀가 300여 년 만에 기록에 나오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김만덕이 의녀의 벼슬을 받았던 것은 상경 뒤 궁궐에 들이기 위한 자격과 지위를 갖춘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지 의학 관련 재능과는 관계가 없다. 곧 김만덕의 의녀 제수는 벼슬이 없는 평민으로서 왕을 알현할 수 없는 까닭에 취해졌던 것이다.

김만덕이 상경해 지내는 동안 주목을 끌었던 일 가운데 하나가 그녀가 중동(重瞳), 곧 한 눈에 두 개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이다. 김만덕 묘비문에도 그녀가 겹눈동자라고 돼 있다. 그녀도 그 스스로 겹눈동자라 했다. 또한 김만덕의 눈 한 쪽이 겹눈동자라는 소문은 서울에서도 널리 퍼져 나아갔다. 역사적으로도 중국문화의 태평성대 성군(聖君)으로 일컫는 고대의 순() 임금과 진·(·)교체기 천하장사 항우(項羽)도 한 눈에 눈동자가 두 개 들어간 것으로 얘기되곤 한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경우는 김만덕이 눈 한 쪽은 눈동자가 두 개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자 김만덕을 자기 집에 부른 뒤 확인했다. 이때 정약용은 승정원의 우승지·좌승지(右承旨·左承旨)를 지내고 있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나라 청와대비서실의 대통령비서실장 다음의 서열에 해당하는 관직에 있었던 만큼 조정과 민정의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워 신속히 대처해야 했을 것이다.

정약용은 김만덕과 면담 이후 중동변(重瞳辨)’, 눈동자가 두 개인지의 옮고 그름을 분별한다라는 제목의 글 한 편을 써 남겼다. 이를 보자면 정약용이 김만덕에게 너의 눈이 겹눈동자라는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녀는 그렇습니다고 했다. 이어 외부의 사물이 둘로 보이냐고 묻고 그렇지는 않다는 대답이 이어진다. 그러자 정약용이 겹눈동자가 아니라고 단언한 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눈동자를 살펴보고는 눈동자의 흑백이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판단한다. 정약용은 만일 눈동자가 두 개라면 외부의 사물이 둘로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겹눈동자가 아님이 명백하지 않느냐고 결론지었다. 눈 한 쪽의 눈동자가 두 개라는 김만덕의 자인과 그 소문은 모두가 황당하다는 것이 정약용의 결론이었다. 더 나아가 정약용은 중국 순·항우의 경우 한 눈에 눈동자가 두 개 들어간 것처럼 얘기하곤 하나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이어 이들이 겹눈동자라 한다면 물건을 볼 때 희미하고 착란케 됨으로 물건의 개수를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니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하는, 곧 하나의 폐인(廢人)’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들 어간의 사정을 볼 때 김만덕의 눈이 겹눈동자라는 사실은 서울에서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것 같다. 또한 정약용이 김만덕의 겹눈동자임을 강력히 부정하는 글을 쓰게 된 데는 굶주림에 허덕이던 육지부 사람들이 김만덕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김만덕과 같은 구휼을 요구할 가능성을 염려하고 이를 원천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을 듯싶다.

결국 김만덕은 구휼의 공에 힘입어 조선시대 제주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관직에 해당하는 행수의녀란 벼슬을 지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학적 소양 혹은 의술을 지니지 않은 채 의녀로 나아갔던 특이한 경우이다.

한편 김만덕의 겹눈동자설은 진위가 불분명하다고 하겠다. 사실 외부 사물의 인식은 눈동자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눈동자 뒤편의 망막과 시신경을 거쳐 뇌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눈동자가 눈에 두 개 있더라도 외부의 사물을 둘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눈에 눈동자가 두 개 들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눈동자 외에 그와 비슷한 형태의 것이 있어 마치 두 개의 눈동자로 볼 수도 있음직하다. 어쨌든 김만덕이 겹눈동자란 소문은 서울에 널리 퍼졌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상가로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정약용조차도 그 소문의 진위여부 파악에 나섰다. 이들은 김만덕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제주민의 진휼에 나섰던 행적이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지를 엿볼 수 있는 근거로 내세울 만한 일이라고도 하겠다.

 

   •우리나라·중국 청피의 약재 서로 다름

제주청귤로 청피를 만들다

'재물보' 의 청피 관련.
'재물보' 의 청피 관련.

우리나라와 중국이 귤피를 약재로 씀에는 서로 상당부분 공통성를 띠고 있는 편이다. 이 가운데 유독 청귤의 귤껍질을 약재로 쓰느냐 여부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다고 하겠다.

중국에서는 현재도 청귤의 껍질을 약재로 쓰지 않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청귤의 청피가 1433향약집성방에 첨 실린 이후 계속 이어져 나아갔다. 그럼에도 문득 온갖 황귤의 덜 익은 열매, 곧 풋귤의 껍질에서 나온 걸 청피라 했던 기록도 확인된다.

청피가 1454세종실록지리지에 청귤과 함께 상당량 상납됐음이 확인된다. 당시 제주사람들은 청귤로 청피를 이미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차별되는 청귤이 제주에 자생했다. 그래서 김정 등도 1520년 이후부터 자신들의 책에 제주청귤을 잘 설명하고 있다. 1611년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도 쑤송(蘇頌)수확함과 동시에 알맹이는 버리고 땡볕에 말린다(收之竝去肉暴乾).”고 말한 청피제조법이 인용·기술됐다. 한편 지난번 얘기했듯이 동의보감의 청피 관련 기록이 미비하나 후학들은 청피가 청귤의 껍질이라고 명확히 정의했음이 드러난다.

1704년 이형상은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청귤껍질은 당유자와 유사하나 작다. 이것이 청피이다(靑橘皮, 類唐柚而小, 此爲靑皮).”고 했다. 곧 청귤은 크기가 황귤보다 작음과 아울러 그 껍질이 당유자 껍질과 유사하거니와 청피의 원료가 된다고 밝힌 것이다.

1732년 정운경은 제주귤보(濟州橘譜)’에서 청귤(중략) 따낸 그 푸른 알맹이가 청피이다(靑橘...摘其靑顆爲靑皮).”고 하듯이, 더욱 작은 크기의 청귤도 그 미숙과는 청피라 했다.

한편 1798년 이만영의 재물보(才物譜)’청귤피, 의사들이 바야흐로 청피라 하는 것은 곧 귤이 노랗게 되지 않고 푸른 것이다(靑橘皮, 醫方謂之靑皮, 乃橘之未黃有靑色者).”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풋귤의 껍질을 청피라고 정의한 기록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풋귤의 청피와 청귤의 청피가 혼용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 와중에서도 1811년 조정철은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청귤(중략) 그 껍질을 말리면 청피가 된다(靑橘...乾取其皮爲靑皮).”고 했다. 1867년 간행 김정희의 완당전집(阮堂全集)’에도 지각은 청귤과 함께 약재로 들어간다(枳殼與靑橘入藥).”고 나온다. 곧 우리나라는 청귤 선 것과 익은 것의 껍질을 청피로 계속 사용해 왔었음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후 1893(고종 30) 들어와 진상제도가 폐지되고, 때 맞춰 제주과원은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제주청귤도 그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중국과는 달리 제주청귤로 청피를 만들었던 차별적 독자성도 퇴색해버린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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