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자반
고등어자반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10.30 19: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희 시인

가을이 깊어갑니다. 성큼 차가워진 날씨, 아침저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에 한기를 느낍니다. 긴 여름 동안 폭염과 태풍을 견디고 밭마다 채워지는 채소의 푸른 이파리를 보면서 올해도 농부들의 고생이 헛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억새가 흐드러진 아끈다랑쉬오름을 갈까 하다가 세화리 오일장 날임이 생각났습니다. 당근밭 김매기로 바쁜 탓인지 오일장은 한산합니다. 장 보러 나온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장의 풍경과 함께 한가롭습니다. 바삐 걷는 이도 없고 다들 느긋한 표정입니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호떡이랑 어묵도 사 먹고 옷가게 앞에서는 눈요기를 즐깁니다. 모종 가게에서는 지금 심어도 잘 자라 줄 채소는 뭐가 있는지 주인에게 물어도 봅니다. 국화꽃에 넋을 잃고 구경만 한다는 게 그만, 나도 모르는 사이 값을 놓고 흥정하고 있습니다. 오일장에서는 흥정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깎아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인 일입니다. 꽃도 사고 어머니 드릴 과자도 사고 금방 버무린 갓김치도 샀네요. 양손에는 이미 검은 봉지가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등대와 긴 방파제를 배경으로 앉은 생선가게에 시선이 갑니다. 고등어자반에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 유언 한마디 없이 황망하게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는 아버지가 생각나서입니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큰맘 먹고 오일장에 가서 고등어자반을 사오면, 솔잎 불씨에 석쇠를 올려놓고 구우셨습니다. 한 마리를 나누어 아버지 앞에는 가운데 토막을 놓으시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주셨는데, 언제나 부족하니 우리는 새끼 제비 같았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한두 젓가락만 드시고 딸들 앞으로 쓱 내미셨지요. 딸들이 버릇없어진다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어머니는 고등어 한 조각 맛보신 적 있으실지 그때는 철이 없어 살펴보지도 못했습니다.

며칠 있으면 아버지 기일입니다. 아직은 어머니 무서워 말을 꺼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제사상에 고등어자반을 올리고 싶다는 야무진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아버지 돌아가시던 30년 전, 그날의 하늘 같습니다.

어려웠던 옛 시절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시 한편 떠올라 올려 봅니다. 이 가을 아파하는 일 없이 시인의 바람대로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나태주 시인의 시 멀리서 빈다전문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