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 사후에 대궐의 대체불가 명의였음 드러나…
장덕, 사후에 대궐의 대체불가 명의였음 드러나…
  • 제주일보
  • 승인 2018.10.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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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의 첫 의사와 여의사(6)
세조가 제주여의를 뽑아 올려 보내라는 기록 부분('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1월 24일조) (2)
세조가 제주여의를 뽑아 올려 보내라는 기록 부분('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1월 24일조)

장덕은 제주의 여의사로 중앙정부의 의료계에도 나아가 명성을 떨쳤다. 그 정도는 대체불가의 명의와 같은 존재라고 하겠다. 이는 장덕의 사후에 벌어진 중앙정부의 움직임에서 엿볼 수 있다.

장덕이 뛰어난 의녀였음은 전국적으로도 꽤 알려진 편이다. 이렇게 된 데는 MBC TV 방영(2003915~2004323일 월·)대장금이란 드라마 영향이 적지 않을 듯싶다. 이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이 41.6%에 달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시청한 인기드라마였다. 국내 종영 후에는 해외의 여러 나라에도 수출됐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의녀의 삶을 다뤘거니와, 주인공 의녀는 장금(長今)이었다. 그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민 픽션이기는 하나, 장금이란 의녀는 실제로 있었다. 장금은 조선시대 국왕 중종의 신임을 받았던 어의녀(御醫女)로서 왕의 주치의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고, 그 관련 사실이 중종실록10회 정도 나온다. 이 가운데 장금이 위대한의 뜻을 가진 ’() 자를 받아 대장금으로도 일컬어졌던 사실도 확인된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장금은 중종 10(1515) 이전부터 의술을 행했음이 드러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장금이 제주출신 의녀 장덕과 인연을 맺은 뒤 그녀로부터 여러 가르침을 받는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로써 장덕의 존재와 그 직능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을 것이나, 장금이 장덕과 인연을 맺었다는 것은 드라마 작가의 상상력에 근거한 허구로 봐야 한다. 장금과 장덕이 각각 중종 10(1515) 이후와 세종대(1418~1450) 말엽~성종 19(1488) 이전 활동했음으로 두 의녀가 만나기에는 시간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장덕의 의술이 귀금에게 전술됐음 등의 기록 부분 (‘성종실록’ 권266, 성종 23년 6월 14일조).
장덕의 의술이 귀금에게 전술됐음 등의 기록 부분 (‘성종실록’ 권266, 성종 23년 6월 14일조).

하여튼 장덕은 세종대 말엽 제주에서 치충(齒虫)과 아울러 눈과 코의 아픈 곳에서도 벌레를 끄집어내 통증을 가라앉히는 의술로서 명성을 떨치던 중 국왕의 잇병 때문에 대궐로 발탁돼 그 치료에 나서서 효험을 거둔 뒤 혜민서(惠民署) 소속의 의녀가 됐다. 이로부터 장덕이 중앙정부의 의료계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생전 그녀의 의술활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를 대신할 의사를 구하려는 중앙정부의 움직임 가운데 장덕의 의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장덕은 40여 년 의녀로서 활동하다가 성종 19(1488) 이전에 죽음을 맞이했던 것 같다. 성종 19(1488) 장덕이 대궐에 없자 국왕 성종이 제주목사 허희(許熙)에게 잇병을 고치는 의녀 장덕은 이미 죽고 이제 그 일을 아는 자가 없으니 이··귀 등 여러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뽑아 적어 보내라는 내용의 문건을 속달로 보냈다. 장덕은 중앙정부의 의료계에서 치아의 벌레 제거술뿐만 아니고 치과 관련 온갖 병증을 치료하는데 남다른 의술을 펼쳤던 것이다. 또한 그 의술의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도 드러난다. 대궐 내에는 치과 분야의 의사가 상당수 있었을 터인데 왕은 장덕만한 이가 없다며 그녀를 대신할 의사를 찾아내려고 안달이 날 정도였던 것이다. 이 가운데 제주의 의사는 치아의 벌레 제거술과 함께 눈과 귀에 들어가 있는 유충(幼蟲)의 적출시술이나 혹은 기생충 감염 병증의 의술에 뛰어났음도 드러난다. 또한 세종대 색자니와 효덕은 제주의 여의사로서 각각 눈과 목구멍에 들어있는 이물질을 끄집어내거나 솎아내는 의술로서 명성이 높아졌다. 이때문에 임금의 부름도 받았다. 국왕 세조도 동왕 2(1456) 제주안무사(濟州按撫使)에게 제주의 여의(女醫) 가운데 난산(難産안질(眼疾치통(齒痛)의 의료에 뛰어난 자 2~3인을 가려서 올려 보내라고 얘기했다.

전통적으로 제주의 의사는 전국의 여느 곳에 비해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병증 치료에 뛰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 의사의 의술이 제주 내에서 계속적으로 전수됐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는 장덕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장덕이 죽고 난 뒤 왕은 성종 19(1488)에 장덕을 대신할 의사를 제주에서 찾고자 부심했다. 그것이 주효했는 지 귀금(貴今)이 성종 23(1492) 이전 혜민서의 의녀가 됐다. 귀금은 제주여성으로 장덕에게 의술을 전수·교습 받았던 것이다. ‘성종실록에 나오는 우승지(右丞旨) 권경희(權景禧)의 말에 의하면 장덕은 치아의 벌레 제거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고 코와 눈 등에 나는 종기도 잘 제거했다고 한다. 장덕은 피부과의 병증 치료에도 능했던 것이다. 곧 장덕은 중앙정부의 의료계에서 피부과 관련 의술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장덕은 자신의 온갖 의술을 그녀의 여종 귀금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또한 귀금은 일곱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 열여섯이 돼야 장덕의 의술을 완전히 교습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국가가 귀금을 면천(免賤) 시킴과 아울러 혜민서의 의녀로 삼았다. 한편 이륙의 청파극담에는 장덕이 자신의 의술을 그녀의 여종 가운데 옥매(玉梅)에게 전수했다고 나온다. 그래서 옥매가 혜민서의 의녀로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기록 상으로는 장덕의 의술이 마치 귀금과 옥매란 두 명의 여종에게 전수됐듯이 나온다. 그럼에도 귀금과 옥매는 한 명이 이름을 달리해 썼다고 하겠다. 곧 옥매는 장덕의 여종으로 지낼 때 지녔던 이름이고 그녀가 장덕의 의술을 교습 받았다는 이유로 면천과 동시에 혜민서의 의녀가 됨에 따라 이름도 귀금으로 고쳤을 듯싶다.

장덕도 자신의 의술을 제주의 여의사 가씨로부터 전수받았듯이 제주출신의 귀금에게 전수해 줬던 것이다. 이로써 귀금은 면천과 함께 두 번째 제주출신의 의녀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제주출신의 의사가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병증 치료에 뛰어났던 전통을 계속적으로 이어나아 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귀금은 장덕의 의술에는 미치지 못 했거니와 중앙정부는 장덕의 의술을 계속 계승코자 부심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겠다.

 

   •‘동의보감’ 수록 청피 관련 내용의 검토(6-1)

청피를 약재로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감귤나무의 열매가 익었을 때 그 껍질이 노랗거나 붉게 되는 걸 황귤(黃橘)’이라 하고, 그 껍질은 황귤피(黃橘皮)’, ‘홍피(紅皮)’ 또는 귤피(橘皮)’라 한다. 반면 익더라도 껍질이 여전히 푸른색을 띠는 감귤은 무엇이라 할까? 허준은 프른귤이라 했고, 그 껍질은 청귤피(靑橘皮)’라 했다. 즉 청귤을 푸른귤로 일컬었던 것이다. 이는 적절한 얘기일까.

허준이 언급한 청귤은 제주청귤을 말한다. 이와 유사한 감귤이 중국의 송나라 때 기록으로도 전한다. 이는 마즈(馬志)가 청감(靑柑), 쑤송(蘇頌)이 청귤(靑橘), 한옌즈(韓彦直)는 녹귤(綠橘)이라 했던 것이다.

한편 1480년에 왕시(王璽)의림집요(醫林集要)’에서 황귤미숙과로 최상품의 사화청피(四花靑皮)’를 만들어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청피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져 왔었던 추세의 결과라 하겠다. 중국의 청피연구에 대해서는 최근에도 검토해 봤다. 그래서 중국의 청피 이용이 일전에 필자가 애기했던 992년 이전의 송나라 초기부터가 아니고 이보다 시기가 앞서는 846년 이전의 당대(唐代)부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곧 린다오런(藺道人)846년 전후에 발간했다고 보이는 선수리상속단비방(仙授理傷續斷秘方)’, 약칭으로는 이상속단방(理傷續斷方)’이라고도 일컫는 책에 청피가 약재로 기재됐음을 확인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청피가 9세기 전반 무렵부터 계속적으로 약재로 이용돼 왔으나, 청귤의 약재이용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한편 우리나라는 조선에 와서 본격적으로 청귤을 약으로 사용했다. 더욱이 감귤류의 가치나 우열도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한다. 이것의 하나가 귤유품제(橘柚品題)’이다. 여기서 청귤과 황귤은 서로 다른 종류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럼 중국과 차별되는 청피, 즉 익어도 푸른색을 띠는 청귤과 그 껍질로 만든 청피의 우리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는 1433년 발간의 향약집성방으로부터 비롯한다. 1520년 김정(金淨)제주풍토록에서는 겨울이 지나 음력 2, 3월이 되면 시고 단맛이 알맞게 된다(經冬到二三月, 酸甛適中)”고 해 청귤이 익는 시기가 황귤과 다름을 말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계속적으로 후학에 영향을 미친다. 1578년 임제(林悌)남명소승(南溟小乘)’, 1602년 김상헌(金尙憲)남사록(南槎錄)’도 역시 청귤을 황귤과 다른 종이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제주에 와 청귤을 봤던지라 정확하게 썼다고 하겠다.

반면 허준은 제주에 와 보지 못해서 그런지 1611동의보감의 귤 관련 기술에 오류를 범한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회에 얘기토록 하겠다.

현 중국에서 판매와 수입의 사화청피.
현 중국에서 판매와 수입의 사화청피.

 

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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