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이산 집념, 황무지를 별천지로 바꾸다
우공이산 집념, 황무지를 별천지로 바꾸다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8.09.30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 제주 &제주인] 2. 한림공원 창업자 송봉규 명예회장

"제주 먹여 살릴 산업은 관광" 내발적 개발 선각자
애향심과 개척정신으로 100만명 관광객 명소 일궈
이윤은 사회 환원...두번째 도전으로 장학.문화사업
"천우신조였다...제주다움은 반드시 지켜야 할 자산"
한림공원 창업자 송봉규 명예회장

제주지역 대표 관광지인 한림공원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장이다.

사계절 온갖 수목이 초록물결을 일렁이는 이곳은 50년 전만 해도 불모의 땅이었다.

북서계절풍이 불면 모래가 날려 언덕을 이루던 황무지였다.

그곳이 한림공원 창업자인 송봉규 명예회장(88)의 피땀에 의해 옥토로 바뀌었다. 공원 내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어리마다 송 명예회장의 혼과 얼이 서려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원동력은 그의 남다른 애향심과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일궈온 제주인 특유의 강인하고 끈질긴 정신력의 근원과도 같다.

우공이산의 집념, 상전벽해를 일구다

송 명예회장은 20대에 제주도의원을 지내며 지역사회 개발에 눈을 떴다. 10여 년간 한림읍 개발위원장도 맡은 그는 미래 제주를 먹여 살릴 산업은 관광이라고 확신했다.

송 명예회장은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엑스포만국박람회에 참가하는 등 일본 열도 각지를 돌며 관광 정보를 샅샅이 수집했다. 19716월 부친의 유산을 정리해 오현학원으로부터 한림읍 협재리 모래밭 30를 사들였다. 수차례 경매에도 팔리지 않던 땅이다.

그는 19715개년 계획으로 한림지구 종합관광개발계획을 수립했다. 협재굴과 인근 해수욕장, 비양도 일대를 하나로 묶어 개발하는 사상 초유의 임해관광단지 조성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암초에 부딪쳤다. 사업부지가 사방림지구인 데다 문화재보호법과 학교보건법, 도시계획법 등의 적용을 받아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행정당국의 통첩을 받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관광산업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절대 부족했다. 사방림지구를 벗어나 개발이 가능한 곳은 불과 33000뿐이었다. 이마저도 암반지대였고 무덤도 곳곳에 분포했다.

포기는 없었다. 송 명예회장은 우선 가시덤불과 바위 제거에 나섰다. 홀로 호미와 낫을 번갈아 쥐었다. 비를 피할 나무 한 그루 없었고, 바람에 날아오는 모래에 눈을 못 뜰 지경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만류했고, 일부 비웃음도 들렸다.

송 명예회장은 굴하지 않았다. 외로운 작업이 거듭되던 중 모래밭을 옥토로 바꾸리란 결심이 섰다. 15떨어진 이시돌목장 주변에서 비옥한 흙을 옮겨와 모래밭에 깔았다. 트럭 2000대 분량에 달했다. 종합관광지로 도약하는 날을 꿈꾸며 개발계획서도 손질했다.

19724월 그는 일본에서 워싱턴야자와 카나리아, 소철, 당종려, 로베리니 등 종자를 수입해 파종했다. 제주에 없던 야자수 씨앗을 불모의 땅에 뿌렸으니 발아(發芽)는 하늘만이 알았다.

송 명예회장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부터 물을 길어다 뿌렸다.

한림공원 조경사업 전개 당시 울타리 축조 작업 모습.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야자수 싹이 나고 묘목이 활착했다. 황무지가 옥토로 바뀐 증거였다. 그는 1979년 일본에서 키위후르츠 묘목을 수입해 국내 첫 재배에 성공했다. 도내 농가에 키위가 보급된 계기였다. 그해 육지에서 느티나무 묘목 1만 그루도 구입해와 키웠다.

송 명예회장이 들여온 나무들은 도내 가로수와 조경수로도 공급됐다.

1982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공원법이 개정돼 관청이 아닌 개인도 공원을 조성할 수 있게 됐다. 한림공원 조성사업 허가가 났고, 그는 망설임 없이 꿈을 실행으로 옮겼다.

같은 해 송 명예회장은 미공개 동굴을 협재굴과 연결해 관람객에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협재굴쌍용굴지대가 1971년 천연기념물 236호로 지정된 후 협재굴 109m 구간만 공개된 상태였다. 그는 미공개 동굴 내 모래를 제거하고 입출구를 정비했다. 동굴 내부가 두 마리의 용이 빠져나온 것 같다는 뜻으로 쌍용굴로 명명했다.

1983년 전장 400m의 쌍용굴과 이미 공개된 협재굴이 연결돼 일반에 공개됐다.

이후 테마시설이 하나둘씩 지속적으로 조성돼 공원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1995년 11월 한림공원을 방문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왼쪽).
1995년 11월 한림공원을 방문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왼쪽).

야자수길과 협재굴쌍용굴황금굴, 산야초정원, 제주석분재원, 재암민속마을, 사파리조류원, 재암수석관, 연못정원, 아열대식물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들어섰다.

야자수들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남국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계절마다 꽃의 향연이 펼쳐져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집념으로 모래밭이 별천지로 바뀌자 관광객이 구름처럼 몰렸다.

국내 정치인과 기업인 등 명사는 물론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일본 대문호 시바료타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수상 등 세계 리더들이 공원을 찾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림공원은 연간 100만명이 찾는 제주의 대표 관광지로 우뚝 섰다.

지하수 개발에 성공하자 기뻐하는 송봉규 명예회장(왼쪽).

내발적 개발 모델이윤은 사회 환원

제주의 오늘과 내일을 응시하던 송 명예회장은 한림공원 창업 30주년이던 2001년 두 번째 도전에 나섰다. 그는 사재 20억원을 출연해 재암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 동안 쌓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해 인재를 육성하고 도덕성을 함양하는 장학사업과 문화사업에 손을 뻗은 것이다. 황무지를 일구던 정성과 인내를 사람에게 쏟았다.

지난해까지 장학사업과 재암문화상 시상 등에 총 172473만원이 지원됐다.

재암은 송 명예회장의 아호로, 인근 재암천에서 따온 데서도 각별한 고향 사랑이 엿보인다.

특히 한림공원은 제주관광 개발사에서 기념비적이다. 대부분 관광지가 외부 자본에 의해 개발되고 최근 가속화되는 것과 달리 지역주민 힘으로 개발된 사업모델이기 때문이다.

고충석 전 제주대제주국제대 총장은 한림공원은 제주에 몇 안 되는 내발적 개발의 준거모델이라고 규정했다. 고 전 총장은 교수 시절 송봉규 지역개발론이란 제목으로 그의 도전정신, 개척정신, 창의개발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도민에게 전하는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최근 자택에서 만난 송 명예회장은 한림공원 개척 여정을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정리했다. 모래밭을 옥토로 만든 건 인력(人力)만으로는 불가능했다는 의미로, 겸손함이 묻어났다.

송 명예회장은 야자수를 비롯한 수목이 모래밭에서 싹을 틔운 것도 그렇고 동굴 연결과정에서 천장의 바위가 떨어졌는데 마침 한밤중이어서 사고가 없었던 점도 하늘이 도왔다양심이 하늘과 통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굳게 믿는다고 회고했다.

실제 한림공원을 두고 천인합작(天人合作), 신인합작(神人合作)이란 말이 회자된다. 공원 조성 당시 직원 사이에 이상하네. 회장님이 나무를 심으면 뒷날 꼭 비가 온다란 말이 돌았다.

송 명예회장은 제주 개발과 관련, “대자연을 원상태를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개발이라며 제주다운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지혜를 모아 바른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충고했다.

송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부친을 이어 한림공원을 경영하고 있는 송상훈 사장(62)한림공원 창업이념은 애향(愛鄕)이고 이를 성취한 힘은 개척정신이라며 앞으로도 중단 없는 개척정신 실천으로 방문객에게 더 큰 감동을 선사하는 세계적 관광명소로 도약하겠다고 다짐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