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출신의 첫 국가공인 여의 ‘장덕’…명성을 떨치다
제주출신의 첫 국가공인 여의 ‘장덕’…명성을 떨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9.19 1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제주의 첫 의사와 여의사(5)
의녀의 양성을 건의하는 허도의 상소 부분(‘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3월 16일조)
의녀의 양성을 건의하는 허도의 상소 부분(‘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3월 16일조).

 

조선시대 제주의 여의사 가운데 장덕(張德, 혹은 長德)이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 같다. 그녀는 제주출신으로 첫 국가공인의 여의(女醫)이기도 하다.

장덕은 중앙정부에서 그녀의 부재에 대해 대책을 강구할 정도로 존재감이 큰 여의였다. 그녀는 주로 치과 관련 의술을 궁궐에서 펼치던 중 성종 19(1488) 이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왕이 장덕의 의술에 비견할만한 의료 능력을 가진 의사가 없다며, ··귀 등 여러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알리라는 내용의 문건을 속달로 제주목사에게 보냈던 것이다.

장덕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궁궐에서 의사로서 큰 명성을 떨쳤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수련의(修鍊醫)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의술을 익히고, 의사로서 첫 의료활동을 벌였던 곳은 제주였다. 이륙의 청파극담에 의하면, 장덕은 제주의 여비(女婢)였고, 가씨로부터 의술을 배웠다고 한다. 가씨는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치충(齒虫), 곧 치아의 벌레를 제거하는 의술에 탁월했던 제주의 여의사였다. 그런 만큼 장덕도 벌레로 야기되는 치통 제거에 뛰어났던 것이다. 또한 눈과 코의 아픈 곳에서도 벌레를 끄집어내 통증을 가라앉히는 의술도 제주에서 펼쳤다.

장덕 이전에도 색자니와 효덕이 제주의 여의사로서 각각 눈과 목구멍에 들어있는 벌레류의 이물질을 끄집어내거나 솎아내는 의술로서 명성이 높았고, 그 때문에 임금의 부름도 받았다. 이들 병증의 치료는 유독 제주의 의사가 뛰어났던 것 같다. 이는 성종 19(1488) 임금이 제주목사에게 이··귀 등 여러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을 찾아내 알리라고 명했던 사실로서도 방증된다. 이로써 제주의 의술은 지역 자체 내에서 계속 전수됐다고도 하겠다. 그 방식은 제주의 의사가 각각 도제식(徒弟式)으로 사사로이 행했던 것임도 드러난다. 장덕의 경우도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왔었던 의술을 도제식으로 교습 받았던 만큼 치충 제거에 탁월했던 한편, 코와 눈 등의 부스럼을 제거하는 의술에도 뛰어났던 것이다.

장덕이 치과 관련 의술에 탁월했음은 그녀가 국왕의 잇병 때문에 대궐로 들어가게 됐다는 청파극담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장덕이 대궐에서 행한 치료가 효험이 있었다는 사실도 나온다. 그래서 혜민서(惠民署) 소속의 여의(女醫)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써 장덕이 제주출신으로 첫 국가공인의 여의사, 곧 의녀로 나아가게 됐던 것이다. 그 시기는 아마도 세종대(1418~1450) 말엽이었을 듯싶다.

조선시대 의녀는 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선발된 뒤, 의술을 배워 의료 활동 등에 나섰던 전문적 직업인에 해당한다. 의녀제도는 태종 6(1406) 지제생원사(知濟生院事) 허도()의 건의에 따라 처음 실시됐다. 그는 부인이 질병이 있는데 남자 의사로 하여금 진맥과 치료를 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품고는 나와서 그 병 보여주기를 꺼려함으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바라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어린 여성 수십 명을 골라 진맥·침구법(針灸法)을 가르친 뒤, 이들로 하여금 치료에 나서게 한다면,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고 상소를 올렸고, 임금은 허도의 건의를 듣자, 의녀제도를 마련했다. 의녀제도는 유교가 사회지도이념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던 조선초기 때 유교적 예와 윤리의 내외(內外), 곧 남들 간의 남녀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 피하는 법에 따라 남성 의사를 꺼리는 여성 환자의 질병치료를 위해 실시됐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전근대사회에서 여의사의 존재가 드러나기는 하나, 조선의 경우처럼 의녀제도란 국가의 공식적 통로를 통해 여의를 확보했던 사실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 의녀는 3년 마다 어린 관비(官婢)70인을 뽑거나, 혹은 비녀(婢女)와 기녀(妓女) 등의 천민층에서 충당했던지라 천시되기도 했다. 이는 점차적으로 의녀가 공적·사적 연회에도 기녀와 같은 존재로 동원·참석함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 나아갔다. 또한 의녀는 여성 환자의 의술과 아울러 간병도 맡았던 한편, 범죄 관련 여성의 상처 조사와 시체 검시 및 여성범죄 혐의자의 몸수색 등을 행하는 수사관 역할도 맡았다. 이밖에도 다양다종의 잡일에도 동원됐다. 조선시대 때 의녀는 유교의 내외법 관련 여성의료인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절실했기에 생성됐으나, 종내 멀티형 직업인으로 나아갔다고 하겠다.

장덕 사후 그를 대신할 의사 제주에서 찾는 부분(‘성종실록’ 권220, 성종 19년 9월 28일조).
장덕 사후 그를 대신할 의사 제주에서 찾는 부분(‘성종실록’ 권220, 성종 19년 9월 28일조).

한편 의녀는 의녀제도가 체계화되면서 의술의 정밀도에 따라 초학의(初學醫간병의(看病醫내의(內醫)3등급으로 분류됐고, 침의녀(鍼醫女맥의녀(脈醫女약의녀(藥醫女)와 같은 직능상의 분화도 이뤄졌다. 더욱이 의서를 배우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의녀들에게 문자교육을 강제·강화해 나아갔다. 의료전문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육도 강화했다. 그 내용은 실용적이고, 쉽게 익혀서 사용 가능한 임상지식과 산부인과에 중점을 둬 이뤄졌다. 의녀의 의학교육은 독자적 전문의료인 보다는 남성 의사의 보조자로서 역할에 수행하는데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특히 세종은 세종 5(1423) 각 도()의 관노 2명씩 뽑아 서울에서 의녀와 함께 의술을 익히게 한 다음, 의술에 능숙한 자를 다시 출신지로 돌려보내 그곳 부녀의 질병을 치료토록 했다. 반면 장덕은 제주에서 여의사로서 명성이 자자해지자 그 소문을 중앙정부가 듣고 의녀로 발탁한 경우라 하겠다.

결국 장덕은 의녀제도를 통해 의술을 익혀 국가공인의 여의사, 곧 의녀(醫女)가 됐던 것이 아니고, 이미 의술이 뛰어난 기성의 제주 여의사로서 중앙정부의 의료계에 나아갔던 셈이다. 이후 장덕은 적어도 치과 분야에서는 남·녀의사를 불문하고, 대체불가의 명의로서 활동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 청피의 의미와 그것의 향약화(5)

청피의 정의에 대한 고찰

 

청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풋귤의 껍질 약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청귤이란 품종에서 거둔 열매의 껍질 약재를 일컫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조선에 와서야 비로소 청피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청피는 중국과 같은 풋귤의 껍질 약재가 아니고, 제주 자생의 청귤로부터 취한 것이다. 이것이 청피혹은 청귤피(靑橘皮)’로 일컬어지는 가운데 점차적으로 향약화(鄕藥化)의 길로도 나아갔다.

향약은 우리나라 고유의 약을 칭하는 용어로서 고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14세기 후반 조선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체계화되어 나아갔다. 이 가운데 향약 관련 전문기관들이 생겨나고, 향약을 바탕으로 한의학도 집대성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정종 1(1399)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1117년 중국 발간의 성제총록(聖濟總錄)’ 등을 인용했다. 이들 책에는 진피·청피가 모두 나온다. 그럼에도 향약제생집성방은 진피만 언급했고, 청피는 거론치 않았다. 이렇게 된 데는 당시에 불거진 청귤논란이 영향을 주었을 듯싶다. ‘청귤논란은 송나라 때 자생하는 청귤을 둘러싸고, 논자들이 각각 청귤과 황귤은 같은 종류 혹은 다른 종으로 보는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다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청귤은 약재로 쓰이지 않았고, ‘향약제생집성방도 청귤 관련 내용을 수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진피의 경우는 제주 자생의 동정귤로부터 만드는 법을 터득했기에 기재하기 시작한 것 같다.

15세기 들어와서는 세종이 의약전문가들을 중국에 파견해 약에 대한 지식의 범위를 넓히는 한편,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향약의 실태를 철저히 조사해 정리토록 했다. 이것이 곧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이다. 중국은 송나라 때부터 익은 청귤, 혹은 감귤미숙과 껍질을 청피로 쓰고, 나중에는 감귤미숙과 껍질만을 청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우리나라는 향약집성방에 청피가 기재되기 시작한다. 이는 익은 청귤의 껍질을 청피로 사용키로 가닥을 잡았다고 하겠다. 이후 익은 청귤의 껍질이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던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에서 자생하는 청귤의 껍질이 귀한 청피로서 취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종 때는 향약 장려정책이 더욱 강구되고 향약집성방을 다시 찍어내며 사용을 권장했다. 게다가 한글의 언해간이향약본초(諺解簡易鄕藥本草)’을 편찬함으로 대중적 보급도 꾀했다. 그럼에도 명나라 의학이 조선에 들어와 극성을 부리면서 향약발전이 지체된다.

16세기에 와서도 향약이 발전해 나가는 가운데 감귤에 대한 연구도 계속 이어져 나아갔다. 김정(金淨)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 감귤류를 9개로 분류하기도 했다. 1564년 명종은 감귤의 가치를 알리는 황감제(黃柑製)’를 시행했고, 그것이 300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7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선조 때부터 편찬작업에 들어갔던 동의보감이 나왔다. 이로써 향약의 체계화를 마무리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청피에 대한 정의는 미흡한 편이다.

진피와 청피가 모두 같이 기재된 ‘성제총록’의 가리륵탕(訶梨勒湯)조.
진피와 청피가 모두 같이 기재된 ‘성제총록’의 가리륵탕(訶梨勒湯)조.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