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을 향기와 건배를! 고소리술
당신의 가을 향기와 건배를! 고소리술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9.1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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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 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논설위원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거짓말처럼 떠나갔다. 언제 그런 더위에 시달렸냐는 듯이 이별을 했다. 막상 갔으니 참으로 시원 섭섭하다. 지겹도록, 짜증이 나도록 함께 했기에 떠나는 뒷모습에 약이 오르기도 하고 괘씸도 하다. 물에 커피에 탄산수에 얼음을 타서 마시고 또 마셨지 않았던가.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하늘 높고 넓은 들판, 소슬한 바람이 찾아왔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허생원과 동이도 활짝 핀 메밀꽃 들판길을 걷는다. 거리엔 빨강, 노랑, 갈색의 낭만 가을로 변했다. 이쯤 해서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듯 별빛에 비추는 술잔을 한 번 들어나 보자. 내친 김에 시 한 구절도 떠올려본다.

강나루 건너서/밀밭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

노래도 한 자락 해본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낭만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스스로 왕따 철학자였다. 46세 폐병으로 죽을 때까지 집을 떠나 홀로 나그네로 전전했다. 주위의 어떤 비난에도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을 폈다. ‘왕따면 어떠리, 가을에는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고 낭만의 가수가 된다. 여기에 향기나는 한 잔 술은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계절 중 낭만을 담은 가을의 술잔이 가장 묘미라고 한다. 여기에서 문제 하나. 제주를 상징하는 가장 오래된 전통술은?

맞다. 700여 년 세월이 흐른 고소리술에 주저함이 없을 터. 고소리는 소주를 내리는 도구인 소줏고리의 방언에서 나왔다. 고소리술은 오메기술이 익었을 때 윗부분에 고인 맑은 청주를 고소리에서 다시 한 번 가열해 받아낸 증류식 소주를 말한다. 다시 말해 좁쌀로 빚은 오메기술에서 나온 술이다. 때문에 기본 원료는 좁쌀이다.

고소리술은 사모주모향주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마을과 집안 제사 때 제주의 어머니들이 고소리술을 빚느라 항상 술 냄새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고소리술은 고려 때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몽골에 항전하다 1273년에 패하고 원나라 직할지인 탐라총관부가 들어서면서 원나라로부터 증류주가 전해지며 시작됐다. 원나라 지배 100년의 역사에서 빚어진 눈물의 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생명의 물을 만들자며 몽골 연금술사들이 증류기법을 만들었다.

현대 들어 고소리술은 1984년 민속마을로 지정된 성읍마을에서 문화재 김을정 할망에 의해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이 빚어졌다. 오메기술의 주재료인 차좁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반죽해 도너츠 크기로 만들고 뭉쳐진 차좁쌀덩어리를 끓이는 물에 넣어 익히며 팥고물이나 콩고물을 입히면 오메기떡이 된다.

술을 빚을 때에는 고물을 묻히지 않는 오메기떡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형태가 무너질 때까지 으깨어서 항아리에 담고 누룩을 넣고 물을 잘박하게 부어 두면 4~5일 뒤에 술이 된다. 이를 그대로 마실 수 있으나 증류시키면 고소리술이 된다.

요즘에는 김을정 할망에 이어 며느리 김숙희씨가 고소리술을 빚고 있다. 올해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하는 찾아가는 양조장(제주 고소리 익는 집)으로 선정됐으며 우리술 품평회에서 최우수상과 2번의 대상 수상 등으로 개성소주, 안동소주와 함께 대한민국 3대 소주로 자리잡았다.

가을날 고소리술을 생각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 고려 최영 장군이 13748월 공민왕 때 전함 314척에 25000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제주에 남아 있는 몽골의 목자들이 일으킨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하고 원의 지배 100년을 종식시켰다. 이때가 그해 가을 922일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실질적인 경호 책임자인 최영 장군이 없는 틈을 타 공민왕이 시해됐다. 하여 사람들은 제주가 아니었던들 고려 멸망과 조선의 개국이 있었을까라고 말한다. 아울러 온천지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또 하나의 역사 속 4·3사건이었다고 떠올린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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