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일깨워 농촌 부흥...기적 일군 '푸른 눈의 돼지 신부'
주민 일깨워 농촌 부흥...기적 일군 '푸른 눈의 돼지 신부'
  • 김현종 기자
  • 승인 2018.09.10 2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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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주 & 제주인] 1. 패트릭 J. 맥그린치

돼지 1마리로 동양 최대 이시돌목장 개척 '제주판 오병이어'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공동체 중심 개발모델 제시
각종 복지시설 세워 사회 환원 실천...존엄사 권리 실현 설파

제주인은 다르다. 제주 특유의 환경을 개척해온 삶의 궤적을 공유하고 있다.

공동체적 삶에서 발원한 수눌음 노동체계, 자연을 이해하고 공생의 가치를 실천하는 지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 등은 제주인의 태생적인 결을 채우고 있다.

변방이던 제주가 최근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위기이자 기회다.

대전환기를 맞은 제주가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데 제주인의 정체성은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이에 본지는 제주인의 유전자를 추적하는 ‘2018 제주 & 제주인을 연재한다.

제주와 국내, 세계를 무대로 우뚝 선 제주인의 인생에서 공통된 유전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제주 출생만이 아니다. 제주의 오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 인물, 그들도 다름 아닌 제주인이다. [편집자 주]

 

벽안(碧眼)의 한 신부가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26세 청년 시절 제주로 건너와 평생 제주사람을 위해 헌신했다.

이시돌목장으로 상징되는 신부는 제주의 가난을 몰아냈다.

목축업 분야에서 신부는 제주를 넘어 한국 목축산업을 일으킨 선구자로 평가된다.

특히 그는 제주 농촌개발에 이정표를 세웠고, 민주적인 지역개발의 본보기를 제시했다.

푸른 눈의 신부또는 돼지 신부로 불린 그는 지난 423일 선종(善終)했다. 향년 90.

그의 일생은 사랑과 희생의 연속이었다. 인간애와 박애정신의 발로였다.

바로 패트릭 J.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다.

법무부는 고인의 생일(66) 하루 전인 지난 65일 고인에게 명예국민증을 헌정했다.

외국인이 명예국민증을 받은 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 ‘소록도 천사로 유명한 마리안느·마가렛 간호사에 이어 네 번째였다. 사후 헌정은 처음이었다.

최근 이시돌목장 명소가 되고 있는 테쉬폰 건축 당시 모습(왼쪽)과 현재 모습.
최근 이시돌목장 명소가 되고 있는 테쉬폰 건축 당시 모습(왼쪽)과 현재 모습.

제주판 오병이어...가난을 몰아내다

맥그린치 신부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성 골롬반 선교회 사제로 제주에 부임했다.

제주중앙성당 공소인 한림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를 맡았다.

제주 땅에 첫발을 디딘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성당을 짓는 일이었다.

당시 한림 앞바다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 당시 미군이 프랑스를 지원하기 위해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9000t급 초대형 화물선 산 마태오호가 침몰해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선장에게 요청해 배 안에 실려 있던 목재들을 한림성당 건축에 활용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또 육지 출장 과정에서 전북 군산 미군부대에 파견돼 있던 군종장교를 만나 성당을 신축하는 사연을 전하자 헌금이 모였다.

성당 신축을 위한 또 다른 도움은 주민들의 손길이었다. 당시 한림 주민들은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옥수수죽과 밀가루죽을 나눠주겠다고 고생을 무릅쓰는 그에게 신뢰를 보냈다. 한림성당 신축 과정에 주민들은 기꺼이 발 벗고 노동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5년 맥그린치 신부 취임 1년 만에 한림성당이 완공됐다.

맥그린치 신부는 신앙생활만으로는 털어낼 수 없는 숙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주민들의 가난을 몰아내고 제주를 일으켜 세울 방법이 없을까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한림과 제주를 희망의 섬으로 만들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성당 신축 당시 주민들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사제를 양성하고 가톨릭 비신자를 신자로 개종시키는 본연의 업무는 차라리 사치였다.

맥그린치 신부는 성경 대신 삽을 들었다. 생전 맥그린치 신부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해 제주를 등지고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제주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뒷받침된 인식이었다. 태생적으로는 제주가 한반도 본토로부터 소외됐듯이 고향인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으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았던 정서에서 비롯됐다.

맥그린치 신부는 양돈산업을 주목했다. 그는 임신한 돼지(요크셔 종) 한 마리를 인천에서 구입해 한림으로 들여왔다. 이 돼지가 훗날 이시돌 목장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날마다 돼지 수가 불어났다. 1957년 맥그린치 신부는 가축은행(동물은행)을 설립했다. 성당 마당에서 키우던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4-H 회원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그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두 마리를 가져왔다. 새끼 돼지들은 중간다리인 가축은행을 거쳐 다시 주민에게 분양됐다. 성당 마당이 비좁을 정도로 돼지와 면양, 닭 등이 금세 늘었다. 가축 분뇨 냄새도 심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목장을 운영하면 성공하겠다고 확신했다. 이시돌 목장이 탄생한 배경이다.

전문성이 없어도 키울 수 있는 새끼돼지는 주민들이 키웠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비육돈은 이시돌 목장이 맡아서 키웠다. 협업을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돼지 생산 규모는 1년에 약 3만 마리에 달했다. 소와 말, 양 사육으로 확대됐다.

이시돌 목장은 동양 최대 규모의 목장으로 성장한다. 그것은 예수가 한 소년으로부터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얻어 5000명 군중을 먹여 살린, 오병이어의 기적과도 같았다.

목축 산업을 기반으로 한림수직이 설립됐다. 그는 원조 공모를 하는 외국 원조단체에 계획서를 작성해 자본을 수급했고, 고향 아일랜드의 모친에게서 집에 있던 물레를 받았다. 친구들에게서 1~2달러씩 도움을 받아 양을 샀다. 주민들의 협력과 노력, 맥그린치 신부의 경영능력이 결합돼 빠르게 확장했다. 1300명 여성을 고용하는 수준에 달했다.

골롬반 소속 수녀들은 디자인과 교육을 맡았고 신부들은 양털을 뽑았고 주민들은 옷을 만들었다. 여성 주민들은 아침에 밭에 가고 낮에 물질을 나섰다가 집에 돌아와 옷을 짰다.

이곳에서 얻은 수익금은 다시 병원과 양로원 요양원, 유치원, 노인대학 등 사회복지시설 조성의 밑거름이 됐다.

한림신용협동조합(한림신협)도 설립됐다. 한림신협은 전국에서 7번째로 만들어졌다.

맥그린치 신부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고 신자들이 중심이 돼 설립하고 운영했다. 가축은행에서 돼지와 닭을 분양받아 키운 수익이 종잣돈이 됐다. 신자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저축을 호소했고 대출금 상환기일이 지난 가정을 방문해 재촉했다.

설립 후 4년이 안 돼 예금이 대출을 크게 웃돌았다. 전국에서 가장 작은 마을에서 탄생한 신협이 전국 최고의 신협이 됐다. 한국 금융사에 남을 일이다.

맥그린치 신부가 한국으로 오는 여객선에서 찍은 사진.
맥그린치 신부가 한국으로 오는 여객선에서 찍은 사진.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개발모델 제시

이시돌목장 개척사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개발사로 평가된다.

맥그린치기념사업회 상임대표인 양영철 제주대학교 교수는 저서 제주한림 이시돌 맥그린치 신부를 통해 이시돌 개발과정을 맥그린치 지역개발 모델로 규정했다.

양 교수는 맥그린치 모델은 개발주체는 외국인인데 지역주민화돼 주민과 함께 지역개발을 주도하고 개발이익은 주민과 사회로 환원한 모델이라며 기존 개발 모델 가운데 내생적 개발 모델과 은혜적 개발 모델을 혼합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맥그린치 모델은 지역개발의 민주주의를 실현했다주민이 직접 참여한 주민의 개발,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결정한 주민에 의한 개발, 주민을 위한 개발이라고 강조했다.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는 2013년 기준 축산사업부와 사료산업부 등 2개의 수익사업부와 복지의원, 요양원, 젊음의 집, 피정의 집, 어린이 집 등 사회복지사업부로 구성돼 있다.

사회복지사업부 업무는 사실상 피정의 집을 빼고 모두 국가와 사회가 수행해야 하는 일로, 곧 개발이익의 사회 환원이다.

양 교수는 맥그린치 모델에서 중심은 항상 공동체라며 공동체 1호는 4-H와 가축은행이고, 2호는 한림신협, 3호는 한림수직, 4호는 양돈협업농가, 5호는 협동조합, 6호는 마을공동목장이다. 마지막 공동체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맥그린치 신부가 품위 있게 돌아갈 수 있는(-다잉) 권리를 사회 구성원들이 누릴 수 있도록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호스피스 병동은 맥그린치 신부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영역이다. 존엄사와 직결된 것으로, 죽음을 앞두고도 쉴 곳 없는 가난한 병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생전에 모든 사람은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이라고 갈파했다.

이시돌의원은 1970년대부터 가난한 말기 암환자와 무의탁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진통제를 투여하고 식료품을 나눠줬다. 2002년부터 이시돌복지의원 내에 무료 호스피스 병동이 마련됐다. 비용 전액은 이시돌목장 사료공장 및 종마사업 수익금으로 충당된다.

맥그린치 신부는 자연과 문화가 중심인 제주다움을 잃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제주 미래를 위해 유언처럼 남긴 주문은 절대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을 하지 말고 슬로우 관광이 되도록 하고 전통을 버려선 안 되고 유기농 농업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시돌 개발을 주목했다. 박 대통령은 1972년 청와대에서 열린 월간 경제 동향보고회에 맥그린치 신부를 불러 이시돌 목장 건설과 운영현황을 보고받고 칭찬했다.

박 대통령은 맥그린치 신부에게 제주 축산 개발의 공로를 기려 석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이보다 앞서 축산분야의 국가적인 숙원이던 목초 개발사업을 중앙지방 행정기관이 줄곧 실패하던 터에 이시돌 목장은 성공한 것이 박 대통령에게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1973217일에는 맥그린치 신부가 청와대를 방문할 당시 약속한 대로 이시돌목장을 찾았다.

박 대통령은 그날 저녁 제주관광호텔(현 하니관광호텔)에서 내무농림건설교육부 장관, 이승택 제주도지사와 동석한 자리에서 맥그린치 신부를 옆에 앉히고 도와줄 것을 물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숙원사업이던 이시돌~한림항 14비포장도로를 포장해 달라고 요청했고 전기전화가 없어 불편한 점도 이야기했고 박 대통령이 지시하자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박 대통령이 이시돌 목장을 방문할 당시 김종필 총리와도 얽힌 재밌는 일화도 전한다.

김 총리가 맥그린치 신부에게 신부님, 이시돌 목장의 외국 소는 이렇게 큰데 우리나라 소는 왜 조그마합니까라고 묻자 맥그린치 신부는 머뭇거렸다. 그때 박 대통령이 임자, 나를 보면 몰라? 어릴 때 잘 못 먹어서 이렇게 작잖아라고 말하자 모두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유년시절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중앙에 가장 어린 아이)과 부모님과 함께 한 맥그린치 신부.
유년시절 형제들과 함께 찍은 사진(중앙에 가장 어린 아이)과 부모님과 함께 한 맥그린치 신부.

맥그린치 신부는

1928년 아일랜드 도네갈군 레터켄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부모의 영향으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부친의 뒤를 이어 수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맥그린치가 성()유난고등학교 3학년 시절 한 신부의 강연을 듣고 장래 진로를 변경했다. 맥그린치는 우연히 들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번 요한 신부의 강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는 말에 깊은 울림을 경험했다.

그는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하느님께서 많은 일꾼이 필요하시어 저를 부르고 계심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는데, 저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고 합니다.’ 194591일 성 패트릭 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한 맥그린치는 그로부터 7년 인고의 시간을 보낸 후 195112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26월 맥그린치 신부는 총장 신부에게서 한국으로 가라는 임지 배정을 받았다.

그에게 한국은 듣도 보도 못한 나라였다.

한국전쟁으로 입국 비자가 나오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미국과 일본을 거쳐 1953414일 동경에서 비행기로 부산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 온 지 1년 만인 19544월 제주, 한림이 그의 새로운 부임지로 정해졌다.

성 골롬반 선교회 사제로 제주에 부임한 맥그린치 신부는 64년간 봉사의 삶을 살았다.

맥그린치 신부는 이 같은 공로로 1975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국제이해 부문)2014년 아일랜드 대통령상(해외사회사업 부문)을 받았다.

앞서 맥그린치 신부는 1966516 민족상(산업 부문 장려상)1972년 대한민국 석탑 산업훈장, 1990년 적십자 봉사상 금장, 2002년 제주도문화상(1차 산업 부문),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장과 제주도지사 감사패, 2014년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다.

<사진 이시돌협회 제공>

김현종 기자  taza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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