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들 다 행 감수과?”
“벌초들 다 행 감수과?”
  • 제주일보
  • 승인 201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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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아흔이 낼 모레인 어머니는 올해도 벌초를 앞두고 한라산만 바라본다. 며칠 전 부터는 아버님 산소에 벌초 갈 얘기 뿐이다. 묘소 뒤쪽 소나무들은 어느 하나도 절대로 잘라서는 아니되고, 담장 주변에 심어놓은 철쭉은 웃자라지 않게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십수년부터 해오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한다.

밤 기온이 떨어지면서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를 보내고 이튿날인 어제 일요일. 한라산은 온통 벌초를 다니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다. 아마 이번 주말까지 벌초는 절정을 이룰 것이다.

벌초 길에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왜 그리 밝을까. “벌초들 다 행 감수과?” ‘겸손함따뜻함이 넘친다.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벌초길에서는 살가운 이웃이 된다. 뿐이랴. 점심을 먹는 사람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성묘객들에게 음식을 권한다.

 

소설가 정비석(鄭飛石·1911~1991)4계절의 속성을 이렇게 구분했다. “봄은 사람의 기분을 방탕에 흐르게 하고, 여름은 사람의 활동을 게으르게 하고, 겨울은 사람의 마음을 음침하게 하건만, 가을만은 사람의 생각을 깨끗하게 한다.”

그래선가. 가을 성묘길에는 이런저런 생각, 뭔가 짙은 그리움이 몰려온다. 돌아가신 분들.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떠올려지고 그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산이 늘 푸르지 않듯이 사람들은 언젠가 세상과 이별해야 한다. 이런 걸 보며 겸허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시기와 질투, 조롱과 무시, 분노와 증오, 복수심과 절망. 격렬했던 감정들이 바람에 휘발(揮發)되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런 날에는 그리운 것들을 많이 그리워해도 절대 죄가 될 것 같지 않다. 벌초 길은 나그네의 시간이고 고독의 시간이며 외로움과 우수의 시간이니까. 만남은 우연이지만 이별은 필연인 법. 가을 벌초길에 그리움이 깊어지는 것은 헤어진 그 사람들이 지금, 함께 하지 못하는 때문일 것이다.

 

가을이 오면 이유없이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한 기분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많다. 시쳇말로 가을을 타는 것이다. 한 줄기 바람 소리에도 맥박이 뛰고,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도 마음이 섬세해진다. 이런 심리를 가을증후군이라 하는데 의학용어로는 계절성 우울증(SAD)’이라고 부른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가을증후군을 심하게 앓는 것 같다.

생각은 더욱 깊어지는 반면 체력이 예전같지 않고, 호르몬 분비 또한 불규칙해지면서 각종 성인병과 함께 비만이 찾아와 괴롭힌다. 마음만 청춘일 뿐 몸은 영 따라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벌초 가는 날만은 다르다. 왠지 모르게 흐믓하다. 또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속에 뭔가 할 일을 했다는 알리바이를 갖춘 탓인지 마음은 한결 더 가볍다. 벌초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의례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기제일 것이다. ‘의례의 부재의미의 부재가 된다. 벌초가 우리의 삶을 확인시켜주는 의미를 갖는 까닭이다.

 

한라산 고지대면 모를까 백로가 지났어도 아직 이슬이 내리지는 않는데 아침 기온은 상당히 차가워졌다.

앞으로 더위가 있다고 한들 그것은 가을을 시샘하는 노염(老炎)이고 잔서(殘暑)일 따름이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곧 이슬이 한 두번 내리면 한라산 단풍도 물들기 시작할 것이다.

벌초를 하고나서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고 각오가 새로워지는 것은 필자 뿐이 아닐 것이다. 초조하지 않은 이 여유로운 마음이야말로 지혜로운 내일을 기약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모든 추악한 것들이 산들 산들 이 가을바람에 날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일에도 대비는 잘 해야 하겠지. 세상사는 알 길 없고 설마가 사람잡는 일은 수두룩하니까.

이 가을에는 하늘이 내리는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자신이 초래한 재앙은 피할 수 없다’(書經 太甲篇)는 말도 잊지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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