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지칠 때 시 한 편의 여유를…
일상에 지칠 때 시 한 편의 여유를…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9.0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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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추천하는 이달의 책] 싸울 때 마다 투명해진다

대학교 때 동아리 친구와 최승자 시인의 시를 함께 낭독하며 한 단어 한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던 기억이 있다.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마냥 같이 읽으며 ! 좋다를 남발하던 때. 대학교 때 이후로 시를 읽어보지 않았다.

이유는그냥 잘 모르겠어서. 왠지 시를 읽으면 시의 성격과 주제, 시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만 같아서.

요즘 몇몇 시인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시를 왜 읽나요? 시인은 그냥웃는다.

장거리 출·퇴근을 할 때는 몸이 피곤했다. 특히 당직이라도 걸리는 날 밤 늦게 집에 오면 아이와 남편은 잠이 들어 있고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 아이스크림 봉지는 이불 옆에 나뒹굴고 장난감은 발 디딜 틈 없이 널브러져 있어 행여 잘못 건드렸다 부서지는 날엔 다음 날 울고불고 난리치는 아이 달래느라 진땀 빼기 십상이었다. 그럴 땐 짜증이 올라오며 남편 잠이나 깨워버릴까 하는 못 된 심보로 왈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한다.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집안일에 치이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서서히 자기를 깨달을 즈음엔 이미 나이가 훌쩍 들어있고 나를 찾기 위해 무얼 하면 좋을 지 몰라 헤맨다.

은유 작가는 이런 기계적인 일상의 노예가 아닌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어서 를 매일 30분씩 읽었다고 한다. 일상에서 수시로 울컥할 때마다 시를 읽고 글쓰기 훈련을 통해 탄생한 은유의 글은 공감 덩어리였다.

왜 우리는 생생한 아픔대신 시든 행복을 택하느냐는 말에 더욱 공감이 갔다. 이야기 한 편이 끝날 때 혹은 중간에 인용된 적절한 시는 때론 감동을, 때론 울분을 배가 시켜 놓았다.

이 책은 1부 여자라는 본분, 2부 존재라는 물음, 3부 사랑이라는 의미, 4부 일이라는 가치 네 개의 큰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여자, 아내, 엄마로서의 본분에 대해 스스로와 세상을 향해 던진 물음에 울분을 삼키기보다 싸움을 택할 수밖에 없던 저자의 고뇌가 드러난다. 그때마다 탄생한 질문 속에서 자기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왔을 작가의 존재 찾기가 2부로 이어진다.

3부에서 남편과 연애할 때 평생 나눌 대화를 다 끝내고 가족이라는 배치에서 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당연했다고 말할 때 말문이 막히더니 김광규의 시 조개의 깊이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숨이 턱 막혔다. 결혼과 사랑에 대한 너무나 현실적인 시라 쓸쓸하기까지 했다.

시 읽기와 철학 공부, 글쓰기 훈련이 집대성되어 이룬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책으로 세상과 내통하는 더 좋은 책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을 담은 4부는 안정된 직장 안에 갇힌 내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대학을 나와 돈 잘 버는 직장에 취직했다 그만 두고 도서관에 근무하기까지 별 고민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며 별 사유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내가 부럽다는, 그러나 내가 부러워하는 한 선배는 지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으로 항상 새로운 것을 이루어 나간다. “가만히 있으면 뭐하느냐고, 사람은 나쁜짓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라도 배울 게 있다”(p.233)는 어느 어머니 말씀은 철학가 니체의 사상과 최승자의 시 이제 가야만 한다와 일맥상통 되어 나에게 재빨리 악행을 저질러라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시적인 순간을 만난다. 그런 순간을 공감하기 위해 시를 읽는다. 시를 통해 삶의 비애를 느끼고 그 비애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시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쓴다며 그냥웃던 시인의 말을 이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다소 철학적인 내용과 시를 서너 번씩 읽다보니 쉽게 읽힌 책은 아니었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찬찬히 읽으며 기억하고, 간직하고 싶은 책이다. 책을 덮으며 오랜만에 책장에서 빛바랜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꺼내본다.

<진승미 한수풀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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