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성장의 상식
혁신성장의 상식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8.2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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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윤호.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동국대 영상대학원 부교수

각종 경제지표가 최악으로 떨어지면서 현 정부는 혁신성장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R&D 예산이 최초로 20조원을 넘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심어주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은 아직 기대보다 우려가 우세하다. R&D 예산 대비 효율로 치면 OECD 국가 중 한국이 최하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연구나 기술 개발, 경쟁에 뒤질리 없는 한국인 유전자가 왜 유독 여기서는 심하게 약할까? 외적인 이유로 정치논리의 산업지배나 기관의 무능 등도 들 수 있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15년 전쯤 일이다. 필자가 바람의 파이터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일본의 마키 센세이에게서 투자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는 최배달(일본명 오야마 마스다쯔) 선생님의 제자다.

그와 개인적 친분이 쌓이면서 사업 방식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를 정점으로 피라미드 형태로 인력구조가 쌓여있고 이에 따라 수십, 수백 명이 사업(대부분은 영화제작)을 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는 센세이(先生)’였지 사장이 아니었다. 본업은 소설가이면서 만화가이고 무도인이다. 그의 형님 역시 유명한 일본 만화 타이거 마스크의 원작자다.

그의 방식은 창작자 한 명에게 모든 경영과 회계, 그리고 노동인력이 맞춰져 그를 서포트하는 식이었다. 즉 경영이나 회계, 노동이 시스템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창작자에게 그것들을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셈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일본엔 그런 스타일이 많다 한다. 특히 창작산업이나 소프트웨어 산업분야에선.

필자가 조감독 생활을 하던 25년 전부터 지금까지 별로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일한 만큼 정당히 받을 돈인데 돈 주는 사람(회계, 총무과 혹은 정부기관)이 큰 소리치고 갑질하는 문화다. 그들 개인 돈도 아닌데 그 횡포(지급일을 미루거나 각종 핑계로 줄이는 것)가 무서워 돈 받을 사람은 여전히 그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게 현실이다.

최근에 말썽이 되고 있는 경영진이나 오너의 갑질도 같은 맥락에서 이상하다. 월급 준다고 연구·개발의 성과가 나면 모두 회사 것, 경영자 것이라고 우기는 그 사회통념도 많이 이상하다.

그런 사회통념, 상식 속에서 회사를 위해 연구·개발을 할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새로운 기술을 갖고 나와서 벤처기업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돈 주는 사람(투자자 혹은 지원부처)이 연구·개발하는 사람의 무릎을 꿇게 하고 간, 쓸개를 다 빼서 무기력하게 만들어 자신의 발 밑에 두려한다.

경영자(관리자) 역시 마찬가지다. 경영자는 당연히 기술자, 발명가보다 우위의 위치라고 생각하고 권위를 부린다. 어떤 발명을 해도 경영을 못 하면 망한다고.

기술특허에 숟가락 얹기로 유명한 스티브 잡스도 아주 일부분만 자기 몫으로 했다. 그럼에도 사후 지금까지도 그의 숟가락 얹기는 기술계의 악행으로 유명하다. 경영자라고 기술특허에 함부로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얘기다.

영화 삼손과 데릴라(1949)’의 데릴라 역으로 세계적인 섹시스타였던 헤디 라마는 또한 발명가였다. 그녀는 2차 대전을 치루는 미 해군을 위해 주파수 도약기술을 만들어 특허를 받고 기증했지만 그 기술은 외면당했다.

그러나 이게 와이파이, 블루투스 등의 기초가 되면서 특허낸 지 50년 후에야 인류에 대한 공헌으로 그녀는 기억되고 칭송된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 중 하나가 기술과 그에 대한 인식이다. 동양에선 부모가 부당하게 살해당하면 자식이 목숨을 걸고 복수하지만 서양에선 부모가 부당하게 기술을 뺏기면 자식은 목숨을 걸고 그 기술을 찾아오고 지킨다. 명예와 함께.

혁신성장은 어쩌면 기술의 문제보다 상식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 상식이 바뀌지 않는 한은 혁신성장은 돈 먹는 하마로 끝날 지도 모른다는 기우가 든다.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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