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두리 꽃
족두리 꽃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8.2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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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시인

연일 폭염이 기승이다. 오죽하면 아흔이 넘은 어르신은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다고 하실까. 오늘도 긴긴 하루해를 어떻게 보내나 싶어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이런 더위는 처음이라며 다들 힘들어한다. 끼니를 챙겨 먹는 일도 힘들어 호박잎 국을 먹으면 입맛이 돌아오겠지 싶어 끓였더니 그마저도 호박잎이 써서 못 먹었다고 한다. 다행히 어제오늘 단비가 내려 가뭄이 조금이나마 해갈이 됐다 하니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어 본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더위에 지쳐 헉헉 거리는데 더위와는 상관없다는 듯 짱짱한 골목이 있다.

구좌읍 평대리에 있는 동제주복지관 건물을 지나 한라산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몇 가구 살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을 만난다.

시멘트 포장이 닿지 않은 길섶 자투리, 혹은 손가락도 겨우 비집어 넣을 공간의 땅만 있어도 백일홍만수국접시꽃족두리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르신들이 잘 계신지 뵙기 위해 차로 쓱 지나가는 곳이다. 잡초도 하나 없이 가꾸어져 계절마다 꽃을 피우기에 궁금했다. 딱히 물어볼 데도 마땅치 않아 궁금한 채로 꽃구경하며 즐겼다.

족두리 모양을 닮은 꽃이 바람에 나비처럼 풍성하게 날을 때면 차로 다니는 게 미안할 지경이다. 차는 멀찍이 세워 두고 이 꽃 저 꽃 헤아리며 걷노라면 일 때문에 다니지만 나들이 나온 기분이 된다. 발걸음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저절로 감성으로 젖어든다.

얼마 전에 물 조리개를 들고 하나하나 물을 주고 있는 어르신을 만났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외지에서 먼 이곳까지 와서 살게 된 이주민이었다. 농촌의 빈집을 빌려 거주하며 용역으로 밭일을 하며 근근이 살았는데 허리가 아파 그 일도 못하게 되었단다. 심심풀이로 꽃을 심다보니 도보로 이십여 분 거리의 구간을 전부 꽃피울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종자도 꽃집에서 돈 주고 구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 몇 해 동안 씨를 받아서 뿌리는 과정을 되풀이하였다 하신다. 꽃들도 마음이 있어 정성에 동했음인지 잘 자라 주더란다. 처음 보는 나에게도 종자 있으면 구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꽃이 피면 나도 행복하고 보는 사람도 행복해져서 좋아어르신의 해맑은 한마디에 더위는 저만치 물러가고, 코끝이 찡한 감동만 남는다. 내 마음 깊은 곳을 살며시 건드리며 정화해 주는 느낌이다.

골목을 꽃길로 가꾸며 지나는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주니 어떤 예술적 행위보다도 값지다. 위대하고도 소박한 어르신의 행복이 오래오래 지속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나이는 어쩔 수 없다지만, 가진 것 없음으로 인해 근심걱정이 솟아나는 일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길가에 핀 족두리 꽃이 시원한 바람을 부르며 손을 흔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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