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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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8.2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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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태.시인/다층 편집주간

교사선생스승의 차이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에, 유의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쓰임에 있어서는 그 말맛이 아주 다르다.

교사선생은 남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이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스승이란 단어는 자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묻어난다.

앞의 말들이 단순히 가르침에 방점이 찍히는 반면에 뒤엣말은 배우는 입장에서 존경의 의미가 강하다.

흔히들 선생은 많지만 스승은 없다는 말들을 한다. 물론 스승과 제자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아니다. 누가 내 스승이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내가 누구의 스승이라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삶의 행로가 바뀌었다면, 그것을 계기로 서로의 관계가 삶의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지속된다면, 혹은 적어도 그럴 마음이라면 비로소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의 교육 현장을 보면 스승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적잖음을 보게 된다. 아니, 스승되기 포기를 강요한다는 게 옳은 표현일 듯하다. 그것은 교사들 자신에게 기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회적 분위기 탓이 더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이다. 각종 평가나 지도 결과에 대해 보호자들의 끊임없는 이의가 제기된다. 규칙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도 시빗거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못 본 척 지나가는 사례가 늘고 있다.

부모라고 않고, ‘보호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적어도 자기 아이들의 교육을 맡긴 부모라면 아이를 위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판단할 줄을 알 것이다.

하지만 보호자는 무조건 자기 아이들 위주다. 자기 아이들의 학교생활에는 관심이 없고, 교사들로부터 무조건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하고, 무조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일부 학교에서는 일체의 복장 규정을 없애겠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만큼 학생들이나 부모들과의 마찰이 잦다는 반증일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학생들에 대한 지도를 포기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것은 나의 과민 탓일까.

적어도 중·고등학교 6년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기 위한 규칙과 질서를 배우는 기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의무는 외면하고 권리 주장만 먼저 가르친다면 불편한 것은 외면하고 편한 것만 찾게 가르치는 꼴이 되지 않을까.

또한 당국의 정책도 문제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부모와 학생들의 선호도에 따라 아이들이 원하는 장소나 프로그램을 운용하라고 한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것의 근본은 아이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아이들이 원하는 것만 하도록 할 것이면, 공부는 왜 시키는가? 공부 좋아하는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던가?

먹기 싫어하는 약이나 음식도 건강을 위해서는 먹여야 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원치 않는 것도 교육적 필요와 판단에 따라서는 하도록 이끄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닌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수학여행이다. 별 다른 교육적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무조건 놀이공원을 가려 한다. 육지부로 가면서 적잖은 돈을 쓰고, 다시 놀이공원에서 거금을 소비하고도, 단지 재미만을 취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살아오면서 우리의 몸으로 경험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생과 노력 없이는 추억이 없다는 사실을.

편한 것, 좋은 것, 하고 싶은 것만 누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미래에 어떤 추억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들 것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함부로 넘어지지 않는 방법, 넘어져도 털고 일어서는 방법을 배울 기회는 학창시절이 아니겠는가.

뉴제주일보  webmaster@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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