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붉은 사암 산맥에 석굴사원 ‘탄성’  
거대한 붉은 사암 산맥에 석굴사원 ‘탄성’  
  • 제주일보
  • 승인 2018.07.2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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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아시아 문명의 원천 신들의 나라 인도를 걷다
(49)삶의 원초적 모습을 지닌 남인도를 찾아서(8)-찰루키야 왕조의 새로운 시도 바다미석굴
바다미석굴 제1굴은 시바에게 바쳐진 동굴로 4개의 석굴 중 가장 오래된 6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너떠라즈 무용신의 춤동작이 묘사 돼 있는 조각이 입구에 있어 눈길을 끈다.
바다미석굴 제1굴은 시바에게 바쳐진 동굴로 4개의 석굴 중 가장 오래된 6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너떠라즈 무용신의 춤동작이 묘사 돼 있는 조각이 입구에 있어 눈길을 끈다.

찰루키야 왕조의 화려한 왕궁과 사원들을 돌아본 후 다시 바다미로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조용했던 바다미 시내는 오후가 되자 다시 복잡해져 차가 이동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작은 골목을 돌아야 하는데 웬 차들이 사방에서 몰려 꼼짝을 못하고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빠져나와 보니 바로 바다미 석굴이 있어 아마도 관광객들이 타고 온 차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번 남인도 여행에서 유일한 석굴사원으로 조성 시대가 6세기랍니다. 힌두교가 굽타왕조로부터 공인되며 불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펼치기 시작하는 시기라는 군요. 데칸지역의 엘로라 카일라사타 석굴이나 오랑가버드 힌두석굴보다 조성시기가 200년 이상 빠르며 유명한 뭄바이 앞바다의 엘레판타 조성시기보다도 앞선다는 기록입니다.

바다미는 까르나타주 북부에 위치해 데칸고원 서부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네요. 이곳은 석굴외에 평지와 동쪽 산위에 남아있는 석조사원과 후대의 이슬람 묘역들이 즐비해 고도(古都)의 정취를 더해준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석굴을 보고 다른 도시로 가서 저녁 기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답니다. 거대한 붉은 사암 산맥에 있는 석굴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 하고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군요. 설명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서둘러 석굴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얼마 못가 다리가 갑자기 뻣뻣해지며 도저히 걸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힘이든지 알 수가 없네요. 계단이 가파르지도 않은데 마치 경사가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숨이 차고 걷기가 어려워 잠시 쉬고 있으니 한 노인이 천천히 오르라는 손짓을 합니다. 이 지역도 고도가 좀 높은 곳인 모양입니다.

인도 각지에서 온 관광객과 학생들이 바다미석굴을 돌아 보고 있다
인도 각지에서 온 관광객과 학생들이 바다미석굴을 돌아 보고 있다

계단에 앉아 쉬면서 바라본 바다미 석굴 아래는 옛 도시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보입니다. 바다미는 기원 후 540년경부터 757년까지 짤루꺼(Chalukya)제국의 수도였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동산에는 사원과 성채, 조각, 비문 등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데 짤루꺼 시대 것뿐만 아니라 요새로 점령당했던 다른 시기의 유적들도 남아있답니다. 라스뜨러꾸떠 왕조의 손에 함락된 이래, 바다미는 차례로 껄랸의 짤루겨 왕조, 깔러쭈려 왕조, 데위기리의 야더브 왕조, 위제너거르 제국의 비자뿌르의 아딜 샤히 왕조, 그리고 머라타인 들에게 점령당한 슬픈 역사를 간직한 도시라고 합니다. 이런 설명을 하던 가이드가 인도 옛 제국의 이름들이 재미있지 않으냐며 설명하는 자기도 어쩔 때는 혼돈할 만큼 어렵다고 합니다. 듣기는 듣지만 무슨 말인지 그냥 넘어 갑니다. 제주어를 처음 듣는 육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바다미는 다양한 점령군들이 남긴 흔적이 많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이제 석굴을 올라 보겠습니다.

1굴은 시바에게 바쳐진 곳으로 네 개의 석굴 중 가장 오래돼 6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동굴 출입문 밖 오른쪽의 절벽 면에는 너떠라즈(무용 신)의 여든 한 가지 춤 동작이 매혹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의 18개 팔에는 뱀, 악기, 뜨라슬(삼지창)이 들려있습니다. 정문 오른쪽에는 거대한 어르더나리시워라(반은 남자, 반은 여자의 모습을 한 시바)의 상이 있고 왼쪽 반은 위시누를 나타낸답니다.

제2굴에 앞에 있는 배불뚝이 난쟁이 상들이 조각돼 있다.
제2굴에 앞에 있는 배불뚝이 난쟁이 상들이 조각돼 있다.

2굴은 위시누에게 바쳐진 동굴로 디자인 면에서 더욱 단순한데 1, 3번 동굴과 마찬가지로 연단의 맨 앞은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불뚝이 난장이들의 상으로 장식돼 있고, 네 개의 석주가 베란다를 받치고 있습니다. 각 석주의 꼭대기에는 신화 속 사자인 얄리(yali) 모양으로 조각한 받침대가 있는데 출입문의 왼쪽 벽에는 돼지 머리를 한 워러하의 상이 있습니다. 워러하는 위시누의 화신이자 짤루겨 제국의 상징이기도 하고, 오른쪽 벽면에는 위시누의 또 다른 화신인 뜨리워 끄러마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네요. 여덟 개의 손에 가지각색의 무기를 들고 악마를 발로 내치는 모습과 천장에는 거루다(반은 사람 반은 새의 모습을 하고 위시누를 태우고 다니는 신)를 탄 위시누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너무 많은 신들을 설명하는데 기억도 못할뿐더러 인도신화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그냥 자료집에 의존합니다.

또아리를 튼 뱀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위시누를 조각한 제3굴에는 뛰어난 조각들이 모여있는 석굴로 힌두신들이 타고 다녔던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또아리를 튼 뱀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위시누를 조각한 제3굴에는 뛰어난 조각들이 모여있는 석굴로 힌두신들이 타고 다녔던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3굴은 비슈누를 위한 석굴로 기원 후 578년 끼르띠위르마왕의 동생인 멍걸레시의 지휘 하에 만들어졌는데 뛰어난 조각들은 이 석굴에 다 있답니다. 왼쪽 벽면에는 또아리를 튼 뱀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위시누를 조각해 놓았고, 천정에는 코끼리를 탄 인드러, 황소를 탄 시와, 백조를 탄 브럼머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처럼 힌두신들이 각자 타고 다니는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군요.

4굴은 젠교 석굴로 네 개의 석굴중 가장 작고 7세기에서 8세기사이에 만들어졌답니다. 석주에는 역시 포효하는 얄리가 있으며 다른 석굴과 디자인이 비슷한데 오른쪽 벽면에 쑤뻐시워너타(젠교 7대 띠르탕꺼르)상이 주위에 20명 이상의 띠르탕꺼르 들에게 둘러싸여 있군요. 내성소에는 젠교 초대 띠르탕꺼인 이디나트의 나상(裸像)의 신볼을 만지면 무슨 효험이 있는지 하도 만져 그 곳만 까맣게 반질거리고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석굴 아래는 거대한 인공저수지가 만들어져 푸른 물이 넘실대고 있고 너머에 힌두사원이 눈에 띈다.
석굴 아래는 거대한 인공저수지가 만들어져 푸른 물이 넘실대고 있고 너머에 힌두사원이 눈에 띈다.

바다미석굴은 규모는 비록 에로라 석굴보다 작지만 본격적인 힌두석굴 중 가장 오래된 석굴이며 석굴 내부의 뛰어난 부조상 때문에 유명하다고 합니다. 거대한 바다미석굴을 돌면서 그 시절 장비도 변변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높은 바위를 파내고 그곳에 부조상과 벽면조각들을 새겼을까. 또 더 놀라운 것은 석굴 앞에는 석굴이 바람과 햇볕 때문에 부식을 막기위해 거대한 암반이 석굴 앞면을 막고 있습니다. 일종의 바람막이로 보입니다. 그 아래로 거대한 인공 저수지에는 푸른 물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산위로 올라가 여러 정복자들이 남겨 놓은 유적도 보고 싶었으나, 또 하나의 신화가 있는 하싼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 <계속

<서재철 본사 객원 기자>

 

제주일보 기자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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