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내 삶 ‘소풍’이었다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내 삶 ‘소풍’이었다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7.1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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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1971)
‘새’(조광출판사,1971) 초판의 겉표지
‘새’(조광출판사,1971) 초판의 겉표지

지난 5월의 어느 날 집안 어른의 장서를 정리하고자 하는 분이 전화를 주셨다. 원래는 한 도서관에 전부 기증을 하고자 했었지만 도서관측에서 제주 관련 도서 일부만 골라서 인수해 갔단다.

책들을 모두 육지로 옮겨가는 것도 무리인지라 계속 소장하실 책들은 제외하고 나머지는 처리할 예정이라는 설명이었다.

일단 그 댁에 방문해 보니 서재와 지하실 등에 상당 량의 장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장서의 전체적인 분량보다 2000여 권은 넘을 것으로 보이는 시집(詩集)들에 더 눈길이 갔다. 예삿 장서가 아니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소장자의 성함을 여쭈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필자도 아는 유명한 원로 시인이셨다.

우리 같은 헌책방의 입장에서는 그런 분의 장서를 구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고, 인수까지 하게 된다면 더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말씀드리고 같은 양의 일반 책들을 인수할 때 평가하는 가격의 세 배 정도의 인수가를 제안해 드렸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셔서 최종적으로 전량 인수가 결정되었다.

보통 그 정도 분량의 책을 인수할 때는 반나절 정도의 작업으로 족하지만, 이삿날까지 며칠 여유가 있었던 관계로 천천히 분류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시집들의 상당부분은 저자 친필 서명 증정본이었고, 필자가 예전부터 소장하고 싶었던 시집과 책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책들을 줄지어 만나게 되는 까닭에 조금 어두침침하고 먼지투성이인 지하실에서 마스크를 쓰고 땀 흘리며 하는 작업이 마냥 즐거웠었다.

그런 책들 가운데 하나가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시인의 시집 ’(조광출판사,1971) 초판본이다. 그의 대표작 귀천(歸天)’ 등이 수록된 첫 시집이자 살아있는 시인이 낸 사상 초유의 유고시집(遺稿詩集)으로 유명한 책이다.

마산중학교 시절 교사였던 김춘수의 눈에 들어 시에 입문했던 그는 1967년 뜬금없이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룬다.

그 후 심한 고문 후유증과 심한 음주, 영양실조 등으로 고생하다가 1971년 어느 날 길에서 쓰러진 시인은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한 동안 친구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 동안 그가 객사한 것으로 생각한 친구들이 그가 남긴 작품을 모아 유고시집 형식으로 낸 게 바로 이 책이다.

우리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기인(奇人)’으로 불린 시인은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나의 가난은’)에 행복해 하고,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小陵調’)며 걱정도 하지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歸天’)고 노래하고 있다.

가난이 직업이라고 할 만큼 고단하고 불행한 삶이었지만 그랬던 자신의 삶을 소풍으로 여기고 그 가난과 불행을 아름다웠더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는 지금을 사는 우리를 여전히 부끄럽게 한다.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시인의 각종 시집들.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시인의 각종 시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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