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비친 바다의 가슴앓이 흔적, 찾을 길 없네…
초승달 비친 바다의 가슴앓이 흔적, 찾을 길 없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8.07.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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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제20코스(김녕-하도올레)/월정마을~한동해안도로 6.0㎞
월정리의 모습.
월정리의 모습.

# 월정리, 어디로 가는가
지도 상의 월정리는 초승달 모양이다. 그러나 ‘남사록’과 ‘탐라순력도’ 등 옛 문헌에는 ‘무주개[無注浦]’였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월정리(月汀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바닷가 모래밭도 물가에 비친 달처럼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 마을에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카페를 차리고 음식점을 내면서 도로변은 어느 도시 못지않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무슨 가슴앓이가 있어 밤새워 뒤척거릴까/ 하늘 아래 가장 깊은 마음을 가졌는데도/ 풀지 못한 암호가 있었던 걸까/ 아침이면 어둠을 씻어내어 저토록/ 푸른 빛깔로 세상을 활짝 열어 놓는데/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어디서 생겨난 걸까/ 저렇게 간절한 기도로 하얗게 부셔지는/ 물살은 점점 목소리가 커져간다/ 저 외침을 통해서 풀어내는 걸까/ 아니면 혼자만의 삼키는 아픔일까/ 잠잠해지면 월정리 바다의 가슴앓이 흔적을/ 찾을 것 같은데 찾을 길이 없다/ 사랑의 가슴앓이를 받아주기에 여념이 없다/ 이 바다를 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멀리에서 찾아 온 사람들을 극진하게 맞이해 준다’  
-이청리 ‘월정리 사랑’ 모두.

# 어등포, 광해군 기착지
월정리가 끝날 즈음에 올레는 들길로 이어지다가 행원리 연대봉이 바로 눈앞에 나타날 즈음 행원포구로 향한다.
행원리는 옛 문헌에 ‘어등개[於/魚登浦]’로 나와 있다. 한때 어등포에 수전소를 두어 판옥전선 1척과 외침에 대비한 식량 3섬, 격군 104명, 사포 23명을 배치하기도 했다.
어등포는 광해군이 유배 올 때 처음 기착한 곳으로 지금의 행원포구에 그 사적을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란 죄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637년에 제주로 옮기려고 대전별감 서리 나장(羅將)을 시켜 압송하다 6월 16일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호송 책임자 이원로(李元老)는 그제서야 광해군에게 이곳이 제주라는 사실을 알리자 깜짝 놀랐고,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죠?’ 하니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좌가연대의 모습.
좌가연대의 모습.

# 좌가연대를 거치면서
어등포에서 행원리 마을로 들어간 올레길은 소소재를 거쳐 9㎞ 지점을 지나 좁은 들길로 이어진다. 바위가 울퉁불퉁 솟았다가 칡넝쿨이 우거지고 조금 넓은 길로 이어지면서, 겹쳐진 밭담의 풍경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러다 주식회사 대동을 지나 행원로 13길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서 남쪽으로 올라간다. 굴 같이 좁은 숲길을 걸어 나오자 알맞은 터에 좌가연대가 자리해 있다.
구좌읍 한동리 1638-1번지에 위치한 좌가연대(佐可烟臺)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3-15호인데 2005년에 복원되었다.
좌가연대는 별방진 소속으로 동쪽에 왕가봉수, 서쪽의 무주연대와 교신하였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었다.
복원할 때 외벽 모서리에 각을 내지 않고 둥글게 모접기를 하여 가운데 연소실을 만들었고, 1차 방호벽을 꽤 높게 쌓은 특이한 모양이다.

안개 낀 한동리 해변.
안개 낀 한동리 해변.

# 한동마을과 도깨비 전설
예전에 한동마을은 ‘괴(槐)’ 또는 ‘괴이리(槐伊里)’라 불렀다. 한자 표기 과정에서 왜곡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민간에 흘러 다니는 ‘도깨비불’ 전설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동리는 ‘도채비’에 대한 전설과 ‘괴 범천총’ 이야기가 여럿 전해진다. 필자가 한동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안개가 자욱이 드리워져 있어 문득 그 전설이 떠올랐다.
오래 전 한동마을엔 도깨비불이 끊임없이 났다. 이 도깨비불은 밤마다 총알처럼 바다 쪽에서 날아들어 초가집 처마 밑에 달라붙으면서 삽시간에 타올랐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온 동네가 전부 망할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당번을 정해 밤마다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서 도깨비불을 내쫒았다. 관에서 그 사실을 알고 이 목사가 직접 와 진상을 조사한 결과 인화라고 단정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주장한 주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자, 어떤 마을주민이 꾀를 내어 화를 면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이 마을 오훈장이 ‘홰나무(槐)로 인해 일어난 불은 한수(漢水)로 꺼야 한다’고 마을 이름을 한동리로 지으면서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 명예도로인 '고태문로'
한동리 해맞이 해안로에서 계룡동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호국영웅 고태문 표지석’과 ‘명예도로 소개’ 표지판이 서 있다.
고태문 대위는 이곳 한동리에서 태어나 1950년 10월 육군 소위로 임관, 1951년 8월 제11사단 제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했는데, 펀치볼 일대의 884고지 탈환을 위하여 앞장서 포복으로 적진에 들어가 백병전으로 적을 무찌르고 고지 탈환에 성공했다.
또 1952년 11월 9일, 제5사단 27연대 9중대장으로 고성지역 351고지를 점령 방어하던 중 적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아 1차 공격은 방어하였으나, 2차 방어에 실패해 ‘진지를 고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남긴 채 전사하고 말았다. 이 명령을 지킨 중대원들은 다음 날 그의 유언대로 재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진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952년 충무무공훈장, 1952년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명예도로 고태문로’는 그의 희생정신을 후세대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출신지역인 동리 해안도로 2.4㎞ 구간을 명예도로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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